그리움과 외로움으로 재구성한 영화적 허구 '덕혜옹주'

입력 2016-11-02 09:32 수정 2016-11-24 10:05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역사적 실재 인물을 다룬 영화는 언제나 논란에 선다. 역사의 사실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영화적 허구가 가진 사실 훼손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진실이라 말한다. 사실과 진실 사이에서 창작자는 줄타기를 한다. 그 평가는 관객의 몫이다. 허진호 감독의 <덕혜옹주>는 어떤 진실을 추구했을까?








영화는 왜 역사의 사실을 바꾸는가?



환자분들이 봤다는 영화를 나도 보게 될 때가 있다. 환자분들께 어떻게 지내셨냐고 묻고는 하는데 그때 영화를 봤다고 얘기하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이 계신다. 그런데 이번에는 <덕혜옹주>를 봤다는 분이 계셨다. 그래서 나도 어느 영화를 볼까 고민하다가 <덕혜옹주>를 보기로 결심했다.



심심할 때 역사책을 보는 버릇이 있어서 고종, 의친왕, 덕혜옹주가 영화 속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마음에 걸렸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영화 처음에 고종이 이완용에게 소리 지르는 부분을 보면서 ! 저건 내가 아는 사실과 다른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계속 영화가 진행되면서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그리고 훌쩍훌쩍 우는 관객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나 역시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실제 덕혜옹주에 대한 역사적 진실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관객들이 몰리는 이유는 뭘까?





이 영화는 덕혜옹주라는 여성에 대한 동정심, 덕혜옹주를 둘러싼 기다림에 대한 공감, 일제에 대한 복수심. 이 세 가지 심리적 요인이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관객들이 덕혜옹주를 보면서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감정 중 하나는 동정심이다. 몰락한 왕가의 황족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는 것 그 자체가 슬픈 것이다. 덕혜옹주 역을 맡은 손예진의 연기를 보다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덕혜옹주가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도 못하고, 원치 않는 결혼을 하고, 황족이라는 이유로 고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보다 보면 관객들의 마음은 점점 무장해제가 된다.



실제 덕혜옹주가 어떤 인물인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냥 스크린 속의 덕혜옹주가 사실이라고 믿게 된다. 그녀가 그렇게 슬픈 삶을 살게 된 이유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기에 더욱 슬프다.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극이기에 더 슬프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서 허진호 감독은 덕혜옹주를 비참한 인생을 사는 한 여인으로 묘사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그녀를 동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도록 유도한다.







감독이라는 예술가의 행보와 만나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를 보면 기다림과 그리움이라는 감정 코드가 잘 살려질 때 작품이 성공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에서는 정원(한석규 분)이 아무 소리 없이 사라지자 다림(심은하 분)이 한참을 기다린다. <봄날은 간다(2001)>에서는 상우(유지태 분)가 마음이 변한 은수(이영애 분)를 기다린다.



<덕혜옹주>에서도 기다림이라는 감정선이 영화를 끌어간다. 김장한(박해일 분)과 덕혜옹주(손예진 분)는 어렸을 때 처음 만난다. 김장한은 덕혜옹주를 다시 만나기 위해 일본군 장교가 되어서 영친왕을 지키는 무관으로 부임한다. 그런데 덕혜옹주의 상해 탈출이 실패하면서 둘은 또다시 헤어진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둘은 또다시 만난다. 둘이 바닷가에서 헤어지게 되는 장면 그리고 세월이 흘러 정신병원에서 다시 만나는 장면이 관객들의 심금을 울린다. 그것이 다가 아니다. 덕혜옹주(손예진 분)는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조선을 그리워한다. 김장한 말고도 덕혜옹주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다.



비중이 작기는 하지만 하녀인 복순(라미란 분)은 덕혜옹주(손예진 분)을 내내 그리워한다. 복순(라미란 분) 뿐 아니라 덕혜옹주가 어렸을 때 옹주를 떠나보낸 궁녀 중 생존자들 역시 덕혜옹주(손예진 분)가 귀국할 때까지 기다린다. 영화의 마지막에 덕혜옹주(손예진 분)는 드디어 고종과 양귀인 즉 아버지와 어머니를 환상 속에서 만난다. 그러면서 영화는 잃어버린 조국을 향한 민족의 그리움을 다루고 있다.






덕혜옹주가 불쌍할수록 그녀를 박해하는 친일파가 밉다. 덕혜옹주로 하여금 끝없이 기다리게 만들고, 그녀를 좌절하게 만드는 일제와 친일파가 밉다. 그들에 대한 증오 역시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그런 점에 있어서 비열한 인상하면 영화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배우 윤제문의 악역 연기가 영화를 끌고 가는 데 큰 몫을 한다.



작년 이맘때 크게 히트 친 영화 <암살>에서 친일파들이 거대한 악행을 저질렀다면, <덕혜옹주>에서는 한택수라는 인간이 사사건건 덕혜옹주를 괴롭힌다. 진짜 인상 더럽게 생긴 윤제문이 너무 예쁜 손예진의 뺨을 갈기는 장면에서 관객의 몰입도는 최고에 달하고, 한택수에 대한 관객의 증오심은 극에 달한다. 그리고 덕혜옹주가 입국이 불가될 때 얄미운 한택수는 미스터 한으로 미국에 붙어 유유히 한국에 입국한다.






절절하게 외롭고 그리운 사람이 대세다



올해 두 개의 애국영화가 경쟁을 펼치고 있다. 하나는 <덕혜옹주>고 또 하나는 <인천상륙작전>이다. 두 영화 모두 같은 바람을 다루고 있다. <덕혜옹주>는 우리가 아무것도 못하고 일본이 전쟁에 패하면서 광복이 주어진데서 기인한 무력감을 덕혜옹주와 김장한을 비롯한 애국지사 이야기를 통해서 극복하고자 한다.



<인천상륙작전>6.25 전쟁에서 이름 모를 한국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얼마나 많은 활약을 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단지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싸웠던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도 북한을 상대로 제대로 싸웠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덕혜옹주>가 완승을 하고 있다. 친일파를 증오하는 관객이 북한을 증오하는 관객보다 더 많은 것 같다. 그 이유는 뭘까?





<덕혜옹주>를 통해서 허진호 감독은 과거의 허진호 감독과 다른 면을 많이 선보인다. 우선 선악의 대결구도가 명확하다. 아울러 액션장면이 등장한다. 총격전을 비롯한 액션장면도 기대한 것보다 강렬하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개봉되었던 때가 1998년이다. 몇몇 영화감독을 제외하고는 신인으로서 한두 개의 영화를 감독하고 나서는 잊히는 것이 현재의 한국 영화계 현실이다.



그런데 중견감독들이 거의 전멸하는 가운데 허진호 감독은 <외출(2005)>, <행복(2007)>. <호우시절(2009)>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살린 영화를 계속 연출해왔다. <호우시절>에서는 중국이라는 외국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시대극에 도전하게 된 것은 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위험한 관계(2012)>였다. 장동건, 장백지, 장쯔이라는 초호화 캐스팅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흥행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덕혜옹주>를 보면서 허진호 감독이 영화인생을 통해 쌓은 역량이 모두 녹아 들어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선 본인의 장기인 심리묘사가 탁월하다. <위험한 관계(2012)>에서 시대극을 찍었던 경험도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위험한 관계(2012)>가 가능했던 이유는 <호우시절> 때문이었다.



<호우시절>의 배경이 중국이었고 고원원이라는 중국배우와 작업을 한 경험으로 인해서 <위험한 관계(2012)> 연출이 가능했다. <호우시절>의 경험이 있었기에 <위험한 관계>가 가능했고, <위험한 관계>의 경험이 있었기에 일제강점기를 대상으로 한 <덕혜옹주>를 찍으면서 마치 지금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을 대하듯이 자연스럽게 심리를 묘사했다.



영화를 보면서 떠오른 영화가 몇 편 있었다. 우선 몰락하는 왕조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을 하니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가 떠올랐다.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 처리는 어쩌면 허진호 감독이 무의식적이건 의식적이건 <마지막 황제>를 보고 영감을 얻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덕혜옹주가 징용을 온 노동자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헝거게임>에서 캣니스 에버딘(제니퍼 로렌스 분)이 광산 노동자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헝거게임>에서는 모킹제이가 흘러나왔고 <덕혜옹주>에서는 아리랑이 흘러나왔다. 허진호 감독이 SF를 찍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손예진의 연기는 완벽했다. <비밀은 없다>에서도 참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덕혜옹주>에서는 그보다 더 잘한다. <비밀은 없다>는 미스터리의 긴장감이 중간에 조금 느슨한 감도 있지만 후반부 긴박감이 대단했었다. 아직 보지 않은 분이 계신다면 권하고 싶다.





덕혜옹주의 충복 하녀 복순 역을 맡은 라미란의 연기도 손예진에 못지않았다.손예진의 노안분장도 대단하지만, 라미란의 동안분장도 그에 못지않게 대단하다. 윤제문의 친일파 연기도 지긋지긋할 정도로 극중 인물에 충실했다. 윤제문이 너무 잘하다 보니 그를 상대로 싸워야 했던 박해일이 다소 밀리는 감마저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전쟁으로 인해서 헤어지고 오랜 세월 그리워하는 마음을 주제로 한 영화를 두 편 소개하고자 한다.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 소피아 로렌,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주연의 <해바라기(1970)>는 오래된 영화이지만 잊을 수 없다.



어린 시절 봤는데도 소피아 로렌의 절절한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소피아 로렌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소식이 끊어진 남편을 찾아 해매는 아내 역을 맡는데 그녀가 남편을 기다리고 찾아 헤매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 사람을 저렇게 그리워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처음 했었다.



기다림 하면 대학생 때 봤던 홍콩영화 <홍진(1991)>도 잊을 수 없다. 당시 한국 남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최전성기 임청하가 주연을 맡아서 금마장(* 중국어권 영화제로서 가장 유명한 대만 영화제) 주요 부문을 휩쓸었던 영화다. 소화(임청하 분)는 장능재(진한 분)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장능재는 일본을 위해서 일하는 매국노였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한 후 장능재는 시골로 달아난다.



소화는 수소문해서 장능재를 따라간다. 그런데 소화는 그곳에서 장능재의 애정행각을 알아채고 배신에 절망한다. 하지만 소화는 나중에 운명적으로 장능재와 또다시 얽히게 된다. 중국을 탈출하지 않으면 장능재는 죽을 수밖에 없다. 대만으로 가는 마지막 배가 떠나고 인파로 아우성인데 소화는 장능재를 배에 밀어 넣고 자신은 대만으로 가는 것을 포기한다. 세월이 흘러 대만인이 중국을 방문하는 것이 허락되자 이번에는 장능재가 중국 본토로 가서 소화를 찾아 헤매면서 슬퍼한다. 가슴이 찡한 영화였다.





그리움과 외로움, 절묘한 심리극의 장기를 가진 허진호 감독은 애국심과 역사의식을 잘 버무린 이 영화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앞으로의 그의 행보가 기대된다. 다음 영화에서도 이렇게 절묘한 조합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글= 칼럼니스트 최명기(정신과전문의)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