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 위의 우직한 노동 집요한 손질이 빚은 예술

손택균기자

입력 2016-11-01 03:00 수정 2016-11-23 16:59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성북구립미술관 ‘집요한 손’전

유봉상 작가의 ‘PIN 20090990’(2009년). 붉은 칠을 한 목판 위에 작은 못을 촘촘히 박아 넣은 뒤 머리 부분을 갈아내 형성한 음영으로 나무숲의 윤곽을 끌어냈다. 성북구립미술관 제공


《미약한 것은 그저 무력할 뿐일까. 20일까지 서울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열리는 기획전 ‘집요한 손(Tenacious Hands)’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서울시립미술관이 미술 소통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소장품을 제공한 협력전시다. 작품 13점은 모두 손의 미세한 움직임을 한 땀 한 땀 우직하게 쌓아 조직해 낸 결과물이다.》
 

 소박한 규모의 기획전이지만 표제에 걸맞은 작품을 알차게 모았다. 개미보다 작은 크기의 글씨를 널찍한 한지 위에 촘촘히 먹으로 적어 내려 산수화를 완성한 유승호 작가의 ‘야∼호’(2007년)는, 그의 작품만을 잇달아 만났던 개인전에서보다 더 유심히 작업 과정을 살피게 만든다. 의성어 ‘야호’를 무수히 새겨 메아리 울리는 산악을 엮어낸 작가의 손길이 장난기 없이 읽힌다.

 한결같이 확인되는 공통점은 작가들이 캔버스 위에 얹은 노동의 흔적이다. 유봉상 작가의 ‘PIN 20090990’은 아크릴물감을 바른 가로 2m, 세로 65cm의 나무판 위에 작은 못을 깨알같이 박아 넣어 형성한 나무숲 이미지다. 붉은 물감을 붉은 점으로 쪼개 음영의 몫을 맡기고, 머리 부분을 갈아낸 못의 은근한 광택에 윤곽과 양감을 맡겼다. 조명과 관람자 위치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는 모습이 실제 숲을 거닌 기억을 상기시킨다. 작가는 “무식한 끈기와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가까이 얼굴을 대고 살펴보면 살짝 징그럽기까지 하다.

 허현숙 작가의 ‘도시계획_당고개지구 상계로 골목길 3’(2013년)은 닥종이를 두 겹 붙인 이합장지 위에 기와지붕 주택과 골목길의 30여 년 전 유년 시절 기억을 연필 선으로 두툼히 쌓아 구성한 작품이다.

 실제 모습이 아니지만 실제에 가깝다. 혼돈, 두려움, 흥미로움이 복잡하게 교차했던 구시가지의 사라진 옛 모습이 빽빽하게 배어 있다. 크기는 가로 2m, 세로 1.3m. 한 번 그은 연필 선 하나의 길이는 대개 1∼2cm 정도다.
 
‘선 하나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런 그림에서 작은 실수 하나는 유독 도드라지기 마련이다. 지독한 집중력 없이는 완성할 수 없었을 이미지다.

함연주 작가의 ‘블루밍 1’(2008년). 작은 점처럼 박힌 것은 크리스털 알갱이다. 수채 색연필로 형태를 만든 뒤 에폭시 레진으로 표면을 덮었다. 성북구립미술관 제공


 함연주 작가의 ‘블루밍’은 언뜻 예쁘게 깎아 수북이 담은 과일 접시처럼 보인다. 바짝 다가서면 두툼한 섬유판에 자그마한 크리스털을 씨눈처럼 박아 넣고 색연필로 그려낸 몽우리 모음이 보인다. 작가는 벼농사로 유명한 경기 이천으로 거처를 옮긴 뒤 이 연작을 시작했다. 식물의 발아와 노동의 관계를 목격한 일상의 경험이 꼼꼼히 공들인 손길의 자취를 통해 전해진다.

 나란히 걸린 오윤석 작가의 ‘감춰진 기억’ 연작(2012, 2013년)은 가로 1.4m, 세로 1.8m의 두꺼운 종이 위에 미세한 칼집을 내 그 찢긴 부분을 꼬아 올린 무수한 음영으로 조성한 이미지 덩어리다. 불경을 바탕으로 했다지만 형상의 정체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작업이 곧 수행”이라는 작가의 설명은 쉬이 납득할 수 있다.

 꿀 덩어리에 들러붙은 먼지의 광택에 대한 기억을 모티브 삼아 연필과 유채물감으로 빚은 도윤희 작가의 ‘꿀과 먼지’(2009년), 지름 4mm의 모조 진주를 무수히 일렬로 박아 기존 텍스트를 나름의 방식으로 기호화한 고산금 작가의 ‘김약국집 딸들’(2007년) 등도 보잘것없는 근경의 퇴적이 예상 밖의 원경을 이룰 수 있음을 확인시킨다.

손택균기자 sohn@donga.com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