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역사속 한식]신선로

황광해 음식평론가

입력 2016-08-31 03:00 수정 2016-11-23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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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해 음식평론가
‘깊은 밤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창에는 하얀 달빛이 가득하다. 밤을 지새워도 이 즐거움은 이어지리라. 신선로(神仙爐)가 있으니.’

조선 전기 문신 나식(1498∼1546)의 문집 ‘장음정유고’의 시 ‘여우음화(與友飮話)’다. ‘벗과 더불어 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라는 뜻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신선로’는 음식이나 안주가 아니다. 지금 신선로는 고기, 생선, 각종 채소 등을 넣고 끓인 ‘음식’ 혹은 술안주이지만 출발은 다르다. 신선로는 찻물을 끓이거나 술을 덥히는 그릇에서 시작되었다. 신선로는 간편하고 휴대하기 좋은 ‘주방기구’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여행길에도 신선로를 가지고 가고, 가난한 방에도 신선로를 두었다. 나식이 직접 썼는지 혹은 추후 누가 적어 넣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시의 끝에는 ‘(신선로는) 술을 덥히는 새로운 모양의 기구로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적혀 있다. 술꾼들이라면 부러워할 만하다. 나식의 벼슬은 종9품, 참봉이었다. 말단 벼슬이다. 가난한 벼슬아치도 중국에서 들여온 술 덥히는 도구, 신선로를 가지고 있었다. 신선로는 우리 고유, 전통의 음식은 아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그릇 이름이다.

조선 전기의 청백리 눌재 박상(1474∼1530)도 칠언율시 ‘제육봉편’에서 ‘신선로의 술이 맑은 가을의 서늘함을 잊게 한다’고 했다. 향촌에서도 신선로를 술 덥히는 도구로 사용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감곡 이여빈(1556∼1631)은 짧은 벼슬살이를 거치고 영주로 낙향해 후학을 기르는 선비로 여생을 보냈다. ‘짚방석 위에 대충 자리하니, 먼저 아전이 가지고 온 술을 꺼낸다. 신선로로 술을 데우고 말린 산닭을 갈라서 먹고 마신다’(취사문집)고 했다. 이여빈은 무척 가난했다. 기록에는 ‘나물과 밥으로 끼니를 잇기도 힘들었고, 보다 못한 주변 사람들이 향교의 관리자로 천거했다’고 적혀 있을 정도였다. 시를 지은 시기는 광해군 10년(1618년) 2월 상순이다. 장소는 안동. 17세기, 신선로는 시골 선비가 술을 덥히는 데 사용한 소박한 도구였다.

신선로는 차를 끓이기에도 좋은 도구였다.

최역(1522∼1550)은 가난한 선비였다. 벼슬살이도 하지 않았다. ‘국조인물고’에 실린 묘갈명에는 ‘최역이 거처하는 방 좌우에 항상 책을 진열해놓고 신선로에다 차를 끓였다’고 기록했다. 오늘날과 달리 차를 끓이는 일은 번거로웠다. 불을 피우거나 보관하는 일은 번거롭고 불편했다. 신선로는 차를 끓이거나 술을 덥히기 편한 도구였을 것이다.

일본도 마찬가지. 조선 후기 문신 신유한(1681∼1752)은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간다. ‘해유록’에는 숙종 45년(1719년) 9월 무렵, 일본 교토 길거리 풍경이 잘 드러나 있다. ‘가게에서 차를 파는 여인들은 옥 같은 얼굴에 까마귀 같은 귀밑을 하였고 신선로를 안고 앉아 차를 달여 놓고 기다리는 모습이 완연히 그림 속의 사람 같았다. ‘신선로 선물’도 있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신선로 선물’을 받았다. ‘이충무공전서’에는 ‘(명나라) 주 천총수가 술잔 6개, 붉은 종이, 작은 그릇 등과 더불어 찻잎 한 봉지, 신선로 1개 등을 선물로 주었다’고 적혀 있다. 광해군 9년(1617년) 석문 이경직(1577∼1640)은 조선사신단(회답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간다. 전쟁이 끝난 지 채 20년이 되지 않았다. 조선사신단의 감정이 좋을 리 없다. 돌아오는 길, 일본에서 사신단과 동행했던 쓰시마 섬 관리 다치바나 도모마사(橘智正)가 사신에게 선물을 건넨다. ‘조총 각 2자루, 신선로 각 2벌, 손거울 각 2개를 세 사신에게 보내왔는데, 모두 굳이 사양해서 물리쳤다’(부상록). 사신단이 선물을 물리치자 다치바나는 “대단치 않은 물건으로 작은 정성을 표시했는데, 물리치니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18세기부터 신선로는 모습을 달리한다. 19세기 초반 김해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낙하생 이학규(1770∼1835)는 고깃국과 더불어 신선로를 언급한다. 19세기 중반의 ‘동국세시기’에도 고기국물, ‘열구자탕 신선로’가 나타난다. 신선로는 차 끓이고 술 덥히는 소박한 도구에서 고기, 생선, 채소 등을 넣고 끓인 화려한 음식으로 바뀐다.
 
황광해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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