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정자]소박한 미술 소비자의 소박한 의문

박정자 객원논설위원 상명대 명예교수

입력 2016-07-14 03:00 수정 2016-11-2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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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의 소변기 이래, 세상의 모든 물건은 예술가가 ‘작품’이라 선언하면 그대로 미술작품이 된다.
그래도 여전한 회화의 매력… 위작시비 이우환 작품 속에 ‘감정의 울림과 떨림’ 있던가


박정자 객원논설위원 상명대 명예교수
미술전공 대학원에 출강하면서 학생들의 작품을 오며가며 참 많이도 보았다. 언젠가 강의동 쪽으로 가는데 멀리 건물 벽에 나무 책상과 걸상들이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기발한 작품에 익숙했던 터라 “아, 저것도 작품이구나” 생각했다. 중간쯤 가보니 작품이 아니라 정말로 책걸상을 옮기려고 쌓아 놓은 거였다. 내 감각이 너무 앞섰나? 조금 멋쩍어하며 계속 걸었는데, 웬걸, 가까이 가보니 가지런히 쌓인 책걸상에 하얀 페인트가 드문드문 칠해져 있었다. 역시 작품이었다!

종이 또는 캔버스 위에 화가가 물감으로 그려놓은 작품이 곧 미술이라고 대부분 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사실 현대 미술이 4각형의 평면을 벗어난 지는 오래되었다. 1917년 마르셀 뒤샹이 남성의 소변기에 ‘R. Mutt’라는 가공의 이름을 사인해 공모전에 출품한 이래 세상의 모든 물건은, 예술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어떤 특정의 장소에 가져다 놓기만 하면, 그리고 그것을 작품이라고 선언하기만 하면, 그대로 미술 작품이 된다.

앤디 워홀은 브릴로 상자들을 마구 쌓아 놓았고, 데이미언 허스트는 포름알데히드에 담겨진 상어의 시체를 유리상자에 넣어 전시했으며, 한국의 설치미술가 이불은 구슬을 꿴 생선들이 전시장에서 썩어가는 냄새까지 미술의 요소로 삼았다. 문학이나 음악이 아무리 변해도 문자와 소리라는 매체에 변함이 없는 것과는 달리 미술은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매체를 이미 100년 전에 탈피하고 세상의 모든 물질적 요소를 전부 자신의 매체로 삼고 있다.

빛 그 자체를 작품의 질료로 삼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은 아름다운 색의 빛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데, 단색 회화처럼 보이는 거대한 액자 속으로, 마치 그림 속을 뚫고 들어가듯 걸어 들어가면, 우리는 또 다른 색깔의 빛 속에 잠기게 된다. 월터 드 마리아의 작품은 까마득히 높은 대 위에 거대한 둥근 화강암을 하나 올려놓은 것인데, 그 거대한 구(球)를 향해 걸어가면서 아! 이것이 바로 숭고 미학의 체험이로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일본 나오시마 지추 미술관).

백남준이 TV를 미술의 매체로 삼은 이래 모든 동영상, 비디오, 영화, 디지털 화면들이 전부 미술의 영역에 편입되었다. 쏟아지는 물속에서 마치 순교자처럼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의 모습을 슬로모션으로 보여주는 빌 비올라의 비디오 작품, 2012년 카셀 도큐멘타 초청 작가 문경원, 전준호의 작품(‘News from Nowhere’)과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을 받은 임흥순의 ‘위로공단’ 등이 모두 영상물이다. 옛날 같으면 각기 예술 영화 혹은 다큐멘터리라는 타이틀이 붙을 작품이 지금은 그저 간단하게 모두 미술이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클레멘트 그린버그에 의하면 한 사회가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이때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형식들의 불가피성을 더 이상 정당화할 수 없게 될 때, 예술가들은 과거의 관습들을 깨뜨린다고 했다. 이것이 아방가르드이다.

아방가르드한 작품만 보다 보면 평면의 캔버스 위에 현실을 재현한 사실적 그림들은 어쩐지 맥 빠지고 시시하게 보인다. 그러나 또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1920, 30년대 미국의 도시 풍경을 아주 쓸쓸하고 금욕적인 터치로 그린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들은 재현이라는 낡은 기법과 시기적으로 오래되었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니 점점 더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오스트리아 감독 구스타프 도이치는 호퍼의 그림 13장의 구도를 그대로 사용해 영화(‘셜리에 관한 모든 것’)를 만들었고, 한국의 SSG닷컴도 호퍼 이미지를 차용하여 동영상 광고를 찍었다.

영국 요크셔 지방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빨강, 보라, 초록의 아름다운 색채로 과감하게 그려낸 데이비드 호크니의 ‘더 큰 그림’ 연작은 풍경화라는 진부한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한없이 감동시킨다. 호퍼의 그림, 호크니의 그림에는, 그것이 베냐민의 아우라이건, 칸트의 숭고이건 간에 여하튼 우리를 아련한 감정으로 이끄는 무엇인가가 있다. ‘도시인의 소외와 고독’이라거나, ‘강렬한 색채의 사용으로 원근감을 없앤 풍경’이라는 말들로 해석해 보았자, 그렇게 말하는 순간 오히려 기체처럼 날아가 버리는,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의 울림이다.

금년 여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위작 시비 논쟁에서 그 진실이 무엇이든, 소박한 미술 소비자의 소박한 의문은 ‘과연 그 작품들에 그런 울림과 떨림이 있는 것인가?’이다.

박정자 객원논설위원 상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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