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무관련성 구멍’ 악용한 권력접근에 취약… 巨惡대책 강화를

김민기자 , 김창덕 기자 , 박창규기자

입력 2016-07-11 03:00 수정 2016-10-09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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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法 필요하지만 이대론 안된다]<5>권력비리 잡아낼 그물 더 촘촘하게

지방 명문고와 명문대를 졸업한 뒤 공직 생활을 하다가 사업가로 변신한 A 씨는 출신 지역 및 동창회와 관련된 온갖 모임에 빠지지 않는다. 특유의 사교성을 바탕으로 동문들의 경조사를 앞장서서 챙기는 건 물론이고 정기적으로 자리를 만들어 식사를 대접한다. 그가 관리하는 인맥 가운데는 자신의 사업 분야와 무관한 공직자도 숱하다.

후배들은 그를 “사업가로 성공하고 선후배 경조사도 두루 챙기며 아낌없이 베푸는 존경스러운 분”이라며 극찬한다. 하지만 A 씨의 속내는 다르다. ‘장차 힘 있는 기관의 간부 자리에 오르거나, 유력 정치인의 측근이 될 수 있는 사람들과 오랜 기간 ‘보험’처럼 쌓아올린 인맥이 언젠가 큰 힘이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이 시행돼도 이런 ‘보험용 관리’는 법 그물망에서 빠져나가기 쉽다. 직무 관련성이 없다면 1회 100만 원 이하, 연간 300만 원 이하의 식사 대접, 선물, 경조사비는 허용되기 때문이다.

김영란법은 ‘직무 관련성이 있다’고 판단될 때만 식사비 3만 원, 선물 값 5만 원, 경조사비 10만 원을 초과해 제공하는 행위를 처벌한다. 따라서 김영란법의 허술하고 과잉 규제적인 대목을 보완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직무 관련성 없음’이라는 구멍을 통해 빠져나갈 수 있는 ‘권력형 비리’의 소지를 차단하기 위한 규정 강화와 정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권력형 부정부패에 대한 대책 없이 ‘곁가지’만 건드리는 것으로는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목표 달성이 어렵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 거악 비리 뿌리 뽑으려면

많은 국민은 김영란법이 권력층에 만연한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어내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다. 하지만 9월 28일 김영란법이 시행돼도 정작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는 ‘거악(巨惡)’들의 은밀한 부정부패 토양은 별로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권력 유착형 비리는 ‘3만 원짜리 식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공을 들이며 작업해 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실제 세간을 뒤흔들었던 진승현 MCI코리아 부회장의 정관계 로비나 ‘박연차 게이트’ 등은 모두 관련자들이 전현직 대통령 친인척을 비롯한 다양한 정관계 인사들과 오랫동안 친분을 쌓으며 ‘대가성 없이’ 금품을 건넨 사건들이다. 상습 도박 혐의로 지난해 실형을 선고받은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 역시 재판 과정에서 판검사 출신 변호사들의 인맥을 활용하려 한 점이 논란이 됐다.

물론 대가성 없이도 처벌이 가능하도록 한 김영란법의 규정은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직무 관련성 없음’이라는 대목은 구멍으로 남을 수 있다. ‘동향, 동문 선후배’식의 외피로 포장한 만남을 통해 1회 100만 원 이내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접대할 경우 법망을 벗어난 ‘스폰서’ 관계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직무 관련성’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마련하고, 직무 관련성이 없는 접대의 허용 기준을 현행(100만 원 이하)보다 훨씬 낮춰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전삼현 숭실대 교수(법학)는 “현재로서는 직무 관련성이나 대가성에 대한 판단 기준이 모호하며, 이는 헌법에 나와 있는 명확성의 원칙에 위배된다”며 “(김영란법이) 일부에 대한 표적 수사나 정치적 압박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와 정치권이 ‘김영란법으로 부정부패가 일소될 것’이라는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면서 정작 권력형 비리 척결을 위한 숙원 대책들을 어물쩍 외면하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을 비롯해 대통령 친인척, 고위공직자,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한 부패 방지 대책들은 김영란법 시행과 상관없이 계속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용 대상자를 보다 구체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이인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 적용 대상자를 명확히 해 ‘화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부정부패가 사회 전반에 걸쳐 구조적으로 얽혀 있다 보니 일부는 ‘부정부패=정부’라고 생각할 정도”라며 “정부의 확고한 실행 의지가 일반인의 신뢰를 얻는 첩경”이라고 말했다.


○ 민간의 자정 노력 동반돼야

김영란법 시행을 계기로 민간에 만연한 비리나 ‘갑(甲)질’ 관행에 대한 자정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기업 간 구매나 납품, 하청 등의 과정에서 이뤄지는 은밀한 리베이트나 뇌물 상납 같은 행태는 김영란법의 ‘그물’로는 처벌이 불가능하다.

실제로 민간의 접대 및 상납은 더욱 은밀해지는 추세다. 원청업체(대기업) 직원들이 하도급업체(중소기업) 직원의 개인 신용카드를 빌려다가 자신들의 회식 비용을 결제하거나 ‘납품 계약’을 무기로 각종 향응을 제공받는 일은 요즘도 비일비재하다. 최근 경찰 수사로 드러난 제약회사들의 리베이트 행태 중에는 제약회사 영업사원들이 ‘감성 영업’이라는 명목으로 의사의 자녀를 학원에 태워주거나 가족들을 데리러 공항에 나가는 ‘픽업 서비스’까지 들어가 있다.

김용철 한국반부패정책학회장은 “처벌은 단기적 처방일 뿐이므로 김영란법 시행을 계기로 국민 전체의 가치관과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창규 기자 kyu@donga.com·김민·김창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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