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크레인… 텅빈 식당… “말뫼의 눈물, 우리 일 될줄이야”

박성진 기자 , 서동일기자

입력 2016-04-18 03:00 수정 2016-04-18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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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이후! 이제는 경제다]

선박업체 입구… 녹슨 자물쇠만 덩그러니 국내 대형 조선소의 실적 부진은 중소 조선기자재 협력업체들이 밀집해 있는 전남 영암군, 경북 경주시, 포항시 등 다른 지역의 경기 침체로 이어지고 있다. 5일 본보가 찾아간 전남 영암군 대불산업단지의 선박블록 제작업체 C산업은 처리할 물량이 없어 경비직원만 입구를 지키게 한 뒤 다른 출입문에는 자물쇠를 채웠다. 영암=서동일 기자 dong@donga.com
높이 138m의 골리앗 크레인 ‘말뫼의 눈물’은 몇 km 밖에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말뫼의 눈물은 2002년 스웨덴 말뫼 시의 조선업체 코쿰스가 문을 닫을 때 현대중공업이 막대한 해체 비용을 부담하는 대신에 단돈 1달러를 주고 사왔다. 1990년대 세계를 주름잡던 스웨덴 조선산업의 몰락과 2000년대 세계 최강으로 자리한 한국 조선산업의 힘을 동시에 보여주는 상징물이었다.

지난해 2월 현대중공업이 원통형 부유식 원유생산저장하역설비(FPSO)를 인도한 뒤 말뫼의 눈물은 부쩍 가동을 멈춘 채 서 있는 날이 많아졌다. 일감이 줄어들어 최근에는 가동 횟수를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라고 했다. 말뫼가 아닌 울산 조선업의 부진을 대변하는 구조물이 된 것이다.

지난해 1조5400억 원의 영업손실을 낸 현대중공업은 올해 1분기(1∼3월) 고작 2억 달러어치(선박 3척)를 수주하는 데 그쳤다. 올 들어 수주 실적 ‘제로’를 기록하고 있는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보다는 낫다지만 울산에선 이미 “조선업의 영광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자조가 흘러나오고 있다.


○ 흔들리는 최대 산업도시, 울산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SK이노베이션, 에쓰오일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있는 울산은 1인당 연평균소득이 6000만 원대인 국내 최고의 부자 도시다. 그러나 2014년 정유사들이 사상 첫 적자를 내고 지난해는 위기에 빠진 현대중공업이 대규모 구조조정을 실시하면서 지역경제가 꽁꽁 얼어붙었다.

‘울산의 강남’이라 통하던 남구 삼산동 일대는 평일 오후 4, 5시면 북적이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던 곳이었다. 하지만 총선 유세가 한창이던 7일 오후 7시 이 일대를 지나는 행인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손님맞이를 위해 켜 둔 네온사인과 음악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테이블 100여 개를 갖춘 한 치킨집 사장은 저녁 첫 손님을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역에서 꽤 유명하다는 한 고깃집 사장은 “평일과 주말 할 것 없이 예약 손님만으로도 월 매출이 1억2000만 원이 넘었는데 요즘은 10분의 1로 줄어 한 달에 100만 원 남기기도 힘들다”며 “요즘 울산에 있는 회사들은 아예 회식을 하지 않고 가족 단위 외식도 뚝 끊겼다”고 말했다.

대형 크레인 ‘말뫼의 눈물’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 설치된 대형 크레인 ‘말뫼의 눈물’은 2000년대 한국 조선업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었다. 하지만 최근 가동을 멈춘 채 서 있는 날이 많아 국내 조선업계 침체를 대변하는 구조물이 돼가고 있다. 현대중공업 제공
지역 중소기업들도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 울산 동구에서 10여 년 동안 현대중공업 3차 협력업체를 운영해온 A 씨는 최근 법원에 파산 신청을 했다. 2차 협력업체에 각종 설비와 인력을 제공하던 회사였는데 최근 2년 동안 실적이 아예 없었다고 했다. 재고는 쌓이고 고정 인건비를 지출하는 사이 회사의 현금 자산은 23억 원에서 4억 원으로 줄었다. 살고 있던 집, 사무실, 쌓여 있는 기자재 등을 닥치는 대로 내놓았지만 사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A 씨는 “일거리 자체가 없으니 최근 비슷한 일을 하는 인근 3차 협력업체 중 30∼40%가 회사 문을 닫았다”며 “조선업이 호황일 때는 회사를 내놓으면 권리금까지 붙여 사가려는 사람이 줄을 섰는데 이제는 문의 전화조차 없다”고 말했다.


○ 들불처럼 번지는 불황의 그늘

조선업의 추락은 경북 경주시와 포항시, 전남 영암군 등 조선 기자재업체들이 밀집한 타 지역에도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경북지역의 한 선박 부품 납품업체인 B사는 지난해 회사 설립 이후 처음 적자를 냈다. 전년 대비 수주 물량이 20∼30% 줄어든 게 결정적이었다. 정규직원과 사내 하도급업체 직원을 포함해 200명이 넘던 회사에는 겨우 130여 명만 남았다. 회사 측은 그나마도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어 추가적인 정리해고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5일 찾아간 전남 영암군 대불산업단지의 모습도 역동성이나 분주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20만 m² 규모 공장을 운영하던 선박블록 제작업체 C산업은 최근 3개월 동안 직원들에게 월급의 20%밖에 주지 못했다. 지금은 아예 물량이 없어 경비직원 1명만 입구를 지키게 한 뒤 정문을 제외한 모든 출입문에 자물쇠를 채워놓았다. 인근의 한 선박 도장업체 공장은 이미 경매에 넘어갔고, 다른 선박의장품 제조업체에도 ‘공장 임대’라고 쓴 현수막이 걸렸다.

선박 부품 제조사 해원산업의 황택기 대표는 “불과 2, 3년 전까지만 해도 산단 내 도로들은 불법주차 차량으로 몸살을 앓았다”며 “지금은 텅텅 비어버린 도로들이 추락한 대불산단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전했다.

대불산단 내 고용 인원은 2013년 1만2943명, 2014년 1만2919명, 지난해 1만1171명으로 감소하고 있다. 선박블록 제작업체 대상중공업의 구내식당도 매일 아침 150여 명이 함께 식사를 하다 지금은 30∼40명으로 줄었다. 이 회사 문제균 사장의 사무실 책상에 놓인 공장가동률 전망치 표에는 8월과 10월은 공장가동률이 10% 안팎, 9월에는 ‘0’으로 표기돼 있었다. 문 사장은 “우리 회사 임직원이 250명으로 1년 만에 절반이 줄었다”며 “장기 침체를 벗어날 마땅한 대안도 없는 상황이라 답답한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울산=박성진 psjin@donga.com /영암=서동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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