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아이언맨의 꿈

전승민 동아사이언스 기자

입력 2016-03-26 03:00 수정 2016-03-26 03:00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웨어러블 로봇의 세계]


영화 ‘아이언맨’의 한 장면. 동아일보DB
“준비되셨죠. 자, 이제 안전줄을 풀겠습니다.”

21일 오후 경북 안동시 경북소방학교. 이곳에서 소방관 교육을 맡고 있는 김남석 교관(37)은 이날 난생처음으로 ‘로봇’을 몸에 입었다. 입으면 힘이 세지는 착용형 근력증강장치, 일명 ‘웨어러블 로봇(입는 로봇)’의 소방관용 상용화 모델을 입어 본 것이다. 로봇 개발진을 제외하면 이 로봇을 실제로 입은 건 김 교관이 처음이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생기원) 출신들이 창업한 로봇 전문기업인 FRT 연구진은 한국형 웨어러블 로봇 ‘하이퍼(HyPER) R1’ 개발을 완료하고 이달 초 실증실험에 들어갔다. 3월 초부터 이곳에서 실증실험을 진행해 왔으며 이날부터 소방관이 직접 실험에 참여했다.

하이퍼 R1은 화재 현장에서 소방관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발된 로봇이다. 재난 현장에서 실제로 쓸 수 있는 웨어러블 로봇이 개발된 건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이번이 처음이다. 시제품 제작까지는 FRT가 담당하며 실제 상용화를 위해 방위산업체 LIG넥스원과 공동 연구를 진행 중이다.



▼ 로봇 입으면 누구나 슈퍼맨… 30kg 짐 짊어져도 가뿐 ▼


김남석 경북소방학교 교관이 상업용으로 개발된 소방관용 웨어러블 로봇 하이퍼 R1을 시험 착용해 보고 있다. 이 로봇은 4월 말까지 현장 검증을 거친 후 실제로 전국 소방서에 보급될 계획이다. 안동=전승민 동아사이언스 기자 enhanced@donga.com
김 교관은 근육으로 다져진 건장한 체구였지만 막상 몸에 로봇을 입자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이기엔 불편해 보였다. 알루미늄 합금으로 만든 금속 기계장치를 벨크로(일명 찍찍이)와 플라스틱 끈으로 온몸에 연결했기 때문이다. 로봇의 무게만 25kg. 로봇을 공중에 매달고 있던 안전줄을 풀고 나니 중심을 잡기도 다소 힘겨워 보였다. 김 교관은 더구나 무게가 8kg가량인 방화장비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실제 화재 현장과 똑같은 상황에서 실험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잠시 후 상황은 반대로 변했다. 짐처럼 느껴지던 로봇이 오히려 힘을 키워주는 ‘도우미’로 바뀐 것이다. 곁에서 로봇을 조작하던 연구원이 ‘잠시만 기다려라’면서 무선조종 장치를 꺼내 로봇의 전원을 켜자 곧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몸에 입고 있던 로봇이 힘을 쓰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휘청대던 김 교관은 ‘위잉, 위잉’ 하는 기계음을 울리며 자유자재로 걷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금방 로봇에 익숙해진 듯, 실험장소로 쓰고 있던 소방학교 체력단련실 내부를 성큼성큼 돌아다녔다.

웨어러블 로봇은 엑소스켈리턴(exoskeleton) 로봇이라고도 불린다. 최근 과학계에선 인공지능을 꾸준하게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으로 사람 스스로 더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돕는 ‘인공신체’에 눈을 돌리기도 한다. ‘웨어러블 로봇’이 보편화되면서 현대인의 생활 모습을 크게 바꿀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초인(超人)’이 될 수 있는 길을 기계 보조장치를 이용해 찾고 있는 셈이다.

김 교관은 “뜨거운 화재 현장에서 방화복을 입고 올라가다 보면 체력적인 한계로 10층 이상 올라가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라면서 “이 로봇을 이용하면 더 높은 층까지 생존자 수색이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고층건물 진입하는 소방관 다리 힘 키워

고층건물에 불이 나면 엘리베이터를 쓸 수 없다. 헬리콥터나 사다리차의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소방관이 생존자를 수색하기 위해 화염을 뚫고 걸어서 올라간다. 이때 무거운 방화복과 11kg이 넘는 공기호흡기 세트는 커다란 짐이다.

하이퍼 R1은 이런 고층빌딩 화재 시 인명구조용으로 쓰기 위해 개발됐다. 소방관들의 다리 힘을 키워주는 ‘하체 강화형’ 로봇이다. 로봇을 입고 가볍게 달릴 수도 있다. 최대 속도는 시속 8km. 최대 동작시간은 두 시간 이하로 다소 짧지만 소방 현장에서 쓰는 공기호흡기는 1대에 45분밖에 쓸 수 없기 때문에 사용상 문제는 없다는 것이 연구진의 설명이다.

하이퍼 R1을 입은 소방관은 약 30kg의 짐을 추가로 짊어지고 하체 피로가 거의 없이 이동할 수 있다.

구조 요청자가 있는 곳까지 두 대 이상의 공기호흡기를 짊어지고 걸어 올라간 다음, 마지막엔 로봇마저 벗어버리고 사람만 구조해서 내려오는 식이다. 하이퍼 R1은 강한 탄소 소재와 알루미늄 합금으로 만들어졌다. 실제 보급 땐 내열 처리도 할 계획이어서 화재 진화 이후엔 수거해서 다시 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장재호 FRT 사장(생기원 수석연구원)은 “세계적으로 상용화 수준의 웨어러블 로봇은 미국과 유럽, 일본과 우리나라 정도만 만들 수 있다”면서 “하이퍼 R1은 재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최초의 웨어러블 로봇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경북소방학교에 설치된 화재진압 연습용 고층빌딩에서 로봇의 성능을 현직 소방관 50명을 대상으로 4월 말까지 실증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소방학교로 교육받으러 온 전국 각지의 현직 소방관들에게 웨어러블 로봇을 착용시켜 보고, 실제로 3층 높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실험을 진행한 다음 단점을 보완하겠다는 것이다.

안상대 경북소방학교 교관은 “앞으로 팔심을 키워주는 상체 강화 기능도 덧붙인 모델이 나온다면 화재 현장 잔해 등을 치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10년 첫 모델 개발, 국내 산업화 첫 사례

이런 로봇이 최근 주목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입으면 힘이 세지기 때문이다. 특히 각광받는 것은 군사용이다. 군인들은 체력이 강할수록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 무거운 포탄 등을 손쉽게 나를 수 있고, 적보다 더 빨리 달릴 수도 있다.

웨어러블 로봇은 무거운 물건을 옮기며 작업해야 하는 산업 현장에서도 가치가 크다. 이미 일본과 국내에선 웨어러블 로봇을 산업 현장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무거운 철판 등을 옮길 일이 많은 조선소, 자동차 생산 기업 등에서 인기가 있다.

하이퍼 역시 처음엔 군사용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이퍼 R1은 생기원 연구진이 2010년부터 꾸준히 개발해 온 실험용 로봇 ‘하이퍼’ 시리즈의 최신형이다. 하이퍼는 2010년 처음 개발한 실험용 모델로 출발해 이후 매년 진일보한 모델을 선보였다. 2011년 하이퍼2, 2012년 개발한 하이퍼3까지 세 종류의 민군(民軍) 겸용 웨어러블 로봇을 차례로 개발했다.

2014년부턴 산업용 로봇 개발로 이어졌다. 산업용 로봇인 ‘하이퍼 2i’ 개발을 완료했으며 이 로봇은 추가 개발을 통해 대우조선해양에 실제로 보급됐다. 산업용 웨어러블 로봇을 자체 개발한 나라는 일본에 이어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두 번째다.

국내 웨어러블 로봇은 대부분 전기모터를 이용하는 데 비해 ‘하이퍼’ 시리즈는 고집스럽게 산업용 중장비 등에 주로 쓰이는 ‘유압식 구동장치’를 이용하는 것도 특징이다. 강한 힘을 내는 데 유리하지만 기름의 압력을 정밀하게 제어해야 하므로 제작하기가 까다롭다.

연구진은 향후 국내에서 400억 원에 가까운 소방용 웨어러블 로봇 시장이 열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현재 하이퍼 R1의 가격은 4700만 원 상당. 상당한 고가지만 모든 부품을 주문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나온 비용이다. 이 때문에 실제로 상용화되면 훨씬 낮은 가격으로 공급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연구진은 대량생산을 하면 대당 800만∼900만 원 정도에 제작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공기호흡기 장치 등과 세트로 대당 1500만 원 이하에 공급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장 사장은 “하이퍼 R1은 소방 현장에 특화된 모델이지만 추가 연구를 거치면 군사 및 산업, 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며 “웨어러블 로봇 기술의 선점은 미래형 로봇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관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동=전승민 동아사이언스 기자 enhanced@donga.com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