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기 “월세 느는 건 부동산서 돈 빼는 신호…‘금융의 삼성전자’ 나올 것”

박용 기자

입력 2016-03-14 03:00 수정 2016-03-14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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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 기자가 만난 사람]증시 개장 60주년 맞은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

《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64)은 대학 때 팝송 200여 곡을 외웠던 ‘로큰롤 마니아’였다. 황 회장이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미시시피 강을 주름잡던 외륜(外輪) 증기선 ‘프라우드 메리호’를 소재로 한 미국 록 밴드 CCR의 ‘프라우드 메리(Proud Mary)’(1968년)다.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1975년 삼성물산에 입사한 그는 프라우드 메리호처럼 한국 금융시장에서 자산운용사, 증권사, 은행, 금융지주 등의 최고경영자(CEO)로 활동하며 약 40년을 쉼 없이 항해했다. 최근 서울 여의도 금투협 집무실에서 지난달 취임 1주년을 맞은 황 회장을 만났다. 그에게 “금융의 삼성전자는 왜 나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제 죄가 많다. ‘자기는 다 해 먹고, 금융 산업 전체는 후진국만도 못 하다’는 말을 듣고 있으니, 죄송하게 생각한다”는 말부터 꺼냈다. 》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은 ‘직업이 금융사 CEO’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국내외 금융시장 경험도 풍부하다. 그는 뱅커스트러스트 인터내셔널 도쿄지점 부사장, 삼성그룹 비서실 국제금융팀장, 삼성증권 대표, 우리금융지주 회장, 우리은행장, KB금융지주회장, 차병원그룹 부회장 등을 거쳤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박용 기자
“금융 규제 90%, 우리 스스로 만든 것”

“금융 규제의 90%는 사실 소비자와 시장이 원해서 만든 겁니다. 우리 국민은 정부에 ‘안전한 시장’, ‘수익률 높은 시장’, ‘금융 소비자가 보호받는 시장’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데 이 세 가지를 모두 달성하는 시장은 없죠. 소비자가 보호받는 시장에선 금융회사들의 활동이 제약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또 “이런 국민의 주문이 법과 제도로 바뀌면서 금융 산업을 계속 조여 왔다”며 ‘귤화위지(橘化爲枳·귤을 기후와 풍토가 다른 곳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뜻)’라는 말로 국내 금융환경에 대한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금융으로 먹고살아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부족하다는 말도 했다. “자산 300조 원짜리 은행에서 1조 원대 이익을 냈다고 뭐라고 하거든요. 노동조합도 ‘이익이 나는데 왜 급여를 깎느냐’고 해요. 3조 원 정도의 이익은 내야 적정 수준인데 말이죠. 이런 인식이 깔려 있으니 금융의 삼성전자도 안 나오는 거죠.”

황 회장은 이달 3일로 개장 60주년을 맞은 한국 증시가 대한민국 현대화와 경제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만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서운함도 내비쳤다. 아직 ‘에퀴티 컬처(주식 문화)’도 약하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최근 드라마에서 ‘우리 며느리는 착해서 주식 같은 것 안 한다’는 대사까지 나오더군요. 많은 사람은 아직도 주식이 지나치게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단기 투자도 많고요.”

그는 “금융통화위원회가 금리를 변화시키면 초 단위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 채권시장, 분 단위 반응이 나오는 곳이 주식시장”이라며 “2003년 금융투자업계의 금통위원 추천권이 폐지된 게 아쉽다”고도 했다.

“술 잘 만드는 노파가 술장사를 시작했는데, 손님이 없어 술이 쉬었어요. 알고 보니 술집 앞에 묶인 사나운 개가 무서워 오지 않았던 겁니다. 한국은 콘텐츠, 인력, 시장 등 좋은 술이 있는데, 외국인들에겐 ‘돈 벌면 욕먹는 나라’ ‘영업하기 위험한 나라’로 비치는 게 문제입니다. 그들의 생각이 틀렸더라도 그들의 인식이 그렇다는 건 수긍하고 들어가야 해요.”

한국의 금융 허브 전략이 10년 넘게 겉돈 이유에 대해선 조심스럽게 ‘맹구주산(猛狗酒酸·사나운 개가 술을 쉬게 한다)’이라는 말을 꺼냈다. 그렇다고 외국인 정서만을 두둔하진 않았다. 지난해 삼성물산과 경영권 분쟁을 벌인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에 대해서는 반외국인 정서와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자빠뜨리기 쉬운 회사가 많은데 한국에서 제일 힘든 상대인 삼성을 왜 겨냥했을까요.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합병이었고요. 구도를 보고 ‘분탕질하러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 회장은 “싱가포르나 홍콩 모델은 어려워도 자산관리업으로는 금융 허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첫째, 자산관리업은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아요. 둘째, 국민연금, 퇴직연금 등 연기금이 빠른 속도로 크고 있어요. 셋째, 중국의 게이트웨이(관문)라는 위치도 기가 막히죠. 금융의 삼성전자도 자산관리업에서 나올 겁니다. 정부가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시작하더라도 싱가포르, 홍콩의 자산운용사가 한국에 오는 건 빨라야 3∼5년이 걸릴 겁니다.”

“자산관리의 금융허브가 대안”

지난해 2월 금투협회장에 취임한 그는 “임종룡 금융위원장 등의 도움으로 업계에서 원했던 규제 완화 리스트 중 4분의 3을 작년에 해결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파생상품 양도차익 과세 등 풀지 못한 4분의 1도 남아 있다고 했다.

그는 “2년간 개인 투자자에 대해 진입장벽을 쳐서 세계 1위 파생상품 시장이 굉장히 위축됐다”며 “‘교각살우(矯角殺牛·쇠뿔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인다)’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금투협은 상반기(1∼6월) 중 정부와 함께 파생상품 규제 영향을 평가할 계획이다.

그는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자산운용사들이 본사와 투자 정보 공유를 하지 못해 ‘갈라파고스에 와 있다’고 말한다”며 “원칙적으로 정보 공유를 허용하되 부당 거래 등 사고가 나면 책임을 엄히 물으면 된다”고 말했다.

“(미국의 투자은행) 골드만삭스가 지난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보기술(IT) 컴퍼니라고 선언했어요. 세계 거래소들도 트레이딩 플랫폼 회사로 바뀌고 있습니다. 앞으로 60년간 펼쳐질 일입니다.”

그는 “한국이 아날로그 쪽으론 자산관리, 디지털 쪽에서는 IT를 활용한 청산결제의 허브가 될 수 있다”며 “한국거래소도 지주회사로 전환하고 IT 플랫폼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세금 빼 채권 사는 시대 온다”

“개인 자산의 약 70%가 부동산입니다. 전세에서 월세로 바뀐다는 것은 부동산에서 돈이 빠져나온다는 얘깁니다.”

그는 “자본시장에 새 꽃이 피는 초입 단계”라며 “사람들이 전세금을 빼 기업 채권을 사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채권과 펀드로 돈이 흘러들지 않는 문제는 해결해야 할 과제다.

“개인이 신용평가회사의 평가를 잘 믿지 않고 채권 가격 차별화가 안 돼 있죠. 펀드매니저도 잘 안 믿어요. 수수료는 너무 비싸죠. 부끄러운 얘기입니다. 투자자의 선택권을 늘려 주려면 펀드 수수료도 기본 운영 보수는 적게 받되 기대만큼 수익이 나면 더 받는 성과 보수 방식을 도입해야 합니다.”

그는 노동 개혁에도 할 말이 많았다. “자동차가 빨리 달릴 수 있는 건 좋은 브레이크가 있기 때문입니다. 높은 급여와 고용 안정성을 동시에 보장할 수 없으니, 급여 유연성을 받아들이되 사회적 가치가 더 큰 고용안정성을 높이자는 겁니다.”

최근 주가 하락으로 손실 우려가 커진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문제에 대해서는 “2∼3년 후 중국 경제에 대한 전망과 관련된 문제이니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 경제의 문제는 다 알려져 있는데 중국 정부가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면 낙관론자,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면 비관론자일 것”이라며 자신을 ‘낙관론자’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달 말 비과세 해외 펀드 상품에 처음 가입할 때 안정적인 선진국 펀드 대신 베트남과 중국 펀드 등을 골랐다.

“KB회장 불명예 퇴진은 정치적 사건”

2009년 KB금융지주 회장 재직 중 2004∼2007년 우리금융 회장 재직 당시 투자했던 파생상품 손실로 불명예 퇴진을 했던 황 회장은 2013년 정부와의 소송에서 이겨 명예를 회복했다. 그는 “2007년 3월에 은행을 나온 사람에게 그 뒷일의 책임을 물어 2009년 문제 삼았던 건 제가 당시 KB금융지주 회장이었기 때문”이라며 “정치적 사건이라고 생각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파생상품 손실도 나중에 많이 회복됐다”며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황영기가 한 것’이라며 대손 처리한 사람들을 배임으로 문제 삼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아버지가 만든 가훈이 ‘정치는 하지 말라’는 것”이라며 “정치의 꿈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 대신 금융권에서 ‘황영기 사단’이라고 불리는 주진형 전 한화증권 사장과 최홍 전 ING자산운용 대표의 정계 진출에 대한 기대는 숨기지 않았다. 주 사장은 더불어민주당, 최 사장은 새누리당에 각각 입당했다.


▼ “인공지능 시대 청년들, ‘신종 4기’ 갖춰야” ▼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은 평소 ‘기술이 금융을 지배하는 시대가 온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인공지능(AI)인 구글 ‘알파고’가 인간계 바둑 최강자인 이세돌 9단을 압도하는 시대에 금융산업의 대변혁이 예고된다는 것이다.

황 회장은 “핀테크(FinTech·금융기술)가 발전하면 펀드매니저나 은행 창구가 많이 없어질 수 있다”면서도 “거래 과정에서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드는 일은 기계로 대체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술 혁신으로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컴퓨터를 단순히 쓰는 것을 넘어 작동하게 만드는 ‘코딩 능력’이 앞으로 중요해질 것”이라며 “청년들이 사회 변화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신종 3기’와 긍정적, 비판적, 창의적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신종 3기는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3가지 기능으로 영어, 중국어, 컴퓨터 코딩을 지칭한다.

‘청년실신(실업자+신용불량자) 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청년 실업과 학자금 대출 등에 따른 부채 문제가 심각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금융 조기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종 3기에 금융 지식까지 갖춘 ‘신종 4기’가 청년들의 필살기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

“여건이 어려워 신용불량자가 된 청년들은 정부가 예산을 써서라도 재도전 기회를 줘야 합니다. 이런 복지수요의 재원은 ‘승자’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어요. 패자 부활과 재출발의 기회를 주는 데 사회의 가용 자원을 투입해야 합니다.”

황 회장은 동아일보 청년드림센터와 금투협이 23일 고려대에서 여는 ‘찾아가는 청년드림 금융캠프’에서 대학생을 대상으로 금융 교육의 중요성과 진로 등에 대한 특강을 할 계획이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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