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초대 국세청장 車번호 ‘관 1-700’… 세수 700억 각오 담아

김철중기자 , 이상훈 기자

입력 2016-02-20 03:00 수정 2016-02-20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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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50돌 맞는 국세청 ‘어제와 오늘’

박정희 대통령이 1965년 ‘조세행정 특별감사반’ 직원들에게 훈시를 하고 있다. 특별감사로 지하경제 및 탈세 현실을 파악한 박 대통령은 이듬해 국세청을 신설했다([1]). 이낙선 초대 국세청장의 관용차. 세수 700억 원을 달성하겠다는 의지로 관용차 번호판을 ‘서울 관 1-700’으로 달았다([2]). 1966년 국세청이 처음 자리 잡은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노라노양재학원’ 건물([3]). 현 국세청 청사. 2014년 12월 정부세종청사로 이전했다([4]). 국세청 제공
1965년 9월 8일 오전 청와대 본관. 박정희 대통령이 푸른 눈의 한 외국인과 자리를 함께했다. 근대 재정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경제학계의 거두’ 리처드 머스그레이브 미국 하버드대 교수였다. 한국 경제 정책을 조언하는 미국 네이선 경제고문단 자격으로 청와대를 방문한 머스그레이브 교수는 박 대통령에게 서류를 하나 건넸다. ‘한국 조세 개편을 위한 건의’라는 제목의 문건이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세율 인상만으로는 세금을 많이 거둘 수 없습니다.”

“동감하오. 마침 그저께 비서실에 조세행정 특별감사를 지시했소.”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일회성 감사로는 부족합니다.”

“방법이 있소?”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고 탈세를 막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미국 국세청(IRS) 같은 강력한 독립 징세기관이 필요합니다.”

박 대통령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듬해 1월, 박 대통령은 재무부에 국세청 설립을 공식 지시했다. 두 달간의 준비를 거쳐 1966년 3월 3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노라노양재학원’ 건물에서 역사적인 개청식을 가졌다. 올해로 개청 50주년을 맞는, 대한민국 나라 곳간을 책임지는 국세청은 그렇게 탄생했다.


국세청장 명의로 광고가 실린 1967년 1월 24일자 동아일보 1면. 세수 700억 원 목표를 달성한 초대 이낙선 청장이 ‘국민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네모 안)라며 감사 광고를 냈다.
개청 첫해 ‘세수 700억 원’ 달성

‘누구도 죽음과 세금은 피할 수 없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1953년 1인당 국민소득 67달러의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에는 세금을 낼 개인도, 기업도 변변치 않았다. 국가 수입의 절반 이상(1957년 기준 52.9%)은 해외 원조로 충당했다. 국민들은 세금 하면 일제강점기 공출(供出)을 떠올릴 정도로 반감이 심했다. 일각에서는 탈세를 범죄가 아닌 경제 활동의 요령으로까지 여길 정도였다.

세수(稅收) 확보는 정부의 염원이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으로 돈을 쓸 곳은 날로 늘어 가는데 해외 원조는 되레 줄기 시작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로 일본에서 받은 8억 달러의 대일 청구권자금은 포항제철 등 경제 기반시설을 짓기에도 빠듯했다. 1965년 미국 경제고문단은 세무행정이 제대로 돌아가면 국내총생산(GDP)의 10% 정도를 세금으로 거둘 수 있다고 조언했다. 박 대통령은 고무됐다. ‘내년이면 GDP가 1조 원으로 늘어나니 세금을 1000억 원 거둘 수 있다는 말 아닌가.’ 그해 국세 수입은 421억 원. 박 대통령은 자신의 오른팔 격인 이낙선 당시 대통령민원비서관을 초대 국세청장에 임명했다. 지시는 간단명료했다. “올해 목표는 700억 원이네.”

여야 정치권은 물론이고 재무부조차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노력한들 전년 대비 66%나 많은 세금을 어떻게 거두냐는 것이었다. 육군 대령 출신이자 5·16 주역인 이 청장은 달랐다. 각오를 다지기 위해 청장 관용차 번호판부터 ‘서울 관 1-700’으로 바꿨다. 조사반 직원들에게는 ‘007 가방’을 지급했다. 검찰, 경찰, 재무부 등이 행사하던 세무사찰 권한은 국세청으로 일원화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일선 세무서는 아침마다 관내 굵직한 업체에 전화를 걸어 협조를 요청하는 게 주 업무였다. 이듬해의 세금을 미리 받는 조상징수(繰上徵收)라는 기상천외한 방법까지 동원됐다. 여당인 공화당에서는 “이렇게 세금을 가혹하게 매기면 어떻게 선거를 치르나. 이낙선 청장은 박 대통령을 낙선(落選)시키려고 작정했나”라는 말이 나왔다. 결과는 704억 원으로 목표 초과 달성. 감격한 이 청장은 1967년 1월 24일자 동아일보 1면에 ‘국민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라며 청장 명의로 광고를 게재했다.

‘재정자립·고도성장’ 두 마리 토끼를 잡다

국세청 설립으로 안정적 세수 확보가 이뤄지면서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 신화가 본격화됐다. 국세청이 거둔 세수를 밑거름으로 정부는 경부고속도로 착공(1968년), 새마을운동 시작(1972년), 중화학공업 육성계획 발표(1973년) 등 일련의 경제 성장 정책을 힘 있게 추진할 수 있었다. 김준경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국세청 설립 등 박정희 정부의 세정 개혁은 원조에 의존하던 한국 경제를 자립형으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며 “세수 확보로 재정 건전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거시 경제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국세청 개청 8년 만인 1974년, 마침내 해외 원조액이 ‘0원’이 되면서 한국은 재정 자립에 성공했다. 1975년에는 연간 국세 징수액이 1조 원을 돌파(1조442억 원)하며 ‘고도성장→세수 증가→투자 확대→경제 발전’이라는 선순환 고리를 구축했다. 세무행정의 틀이 갖춰지면서 종합소득세(1975년), 부가가치세(1977년) 등 선진화된 세제(稅制)도 본격 도입됐다. 징세만이 다가 아니었다. 기업 사채 감시, 부동산 투기 단속, 물가 점검 등 경제 분야에서 공권력을 필요로 할 때는 어김없이 국세청이 활약했다.

지난해 국세청은 사상 최대 징수 실적(208조1600억 원)을 달성했다. 발족 첫해와 비교하면 무려 2957배로 증가한 규모다. 세무자료 전산화, 신용카드 현금영수증 정착 등은 지하경제 양성화에 큰 힘이 되고 있다. 연말정산 간소화 서비스, 미리 채워주는(pre-filled) 사업소득 신고 서비스 등은 개발도상국에서 앞다퉈 배워갈 정도로 우수성을 입증받았다.


비리 척결, 역외탈세 대응은 과제

하지만 지난 50년간 국세청에 밝은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개청 당시 국세청의 3대 지표 중 하나가 ‘오명불식’이었다는 것은 세무공무원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뇌물수수 등 비리 사건은 국세청 이미지를 흐리고 있다. 국세청 직원의 견책 이상 징계 건수는 2010년 75건에서 2014년 157건으로 4년 새 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임환수 국세청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극소수의 일탈로 모든 성과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악순환을 이제는 끊어야 한다”며 청렴문화 정착을 강력 주문했다.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과 더불어 ‘4대 권력기관’으로 꼽히는 국세청의 강력한 힘은 세무조사 권한에서 나온다. 과거 국세청은 세무조사를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한 나쁜 선례를 남겼다. 1991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정치 참여를 준비하자 국세청은 현대그룹에 세무조사를 실시해 1361억 원의 세금을 추징했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 직후의 포스코 세무조사, 김대중 정부 시절 언론사 23곳 동시 세무조사도 대표적인 정치 목적의 세무조사로 꼽힌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후원한 박연차 회장의 태광실업을 세무조사하며 ‘박연차 게이트’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지금도 논란거리다.

최근 잇따라 불거지고 있는 대규모 과세불복 소송과 역외탈세 문제도 국세청이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로 꼽힌다. 지난해 4000억 원에 이르는 KB국민은행과의 조세소송에서 국세청이 대법원 패소 판결을 받은 게 대표적이다. 그만큼 납세자의 권리가 높아졌다는 의미도 있지만, 법률로 집행되는 과세에 대한 불신이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국경을 넘나들며 이뤄지는 역외탈세를 잡기 위한 국제적 공조 마련도 절실하다.

김봉래 국세청 차장은 “세금 부과 처분이 취소되면 원인을 분석하고 문제점이 있는 제도는 고쳐 유사한 사례가 재발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며 “납세자 권익 보호를 최우선 순위에 두면서 비정상적 탈세는 모든 역량을 결집해 엄단하겠다”고 말했다.

세종=이상훈 january@donga.com / 김철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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