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추운 날, 털모자 쓴 음료에 “손이 가요 손이 가”

신현암 삼성경제연구소 자문역

입력 2016-01-11 03:00 수정 2016-01-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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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R in Practice: 이노센트 스무디 성공사례 통해 본 스토리텔링의 힘

세 명의 친한 친구가 있었다. 영국 대학에서 처음 만나 언젠가는 사업을 함께 하리라는 꿈을 나눴지만 학교를 졸업한 후 각자의 길을 갔다. 현실의 삶은 고달팠다. 늘 일에 치여 살았고 여행을 간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하루하루 바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세 친구는 오랜만의 휴일을 맞아 대학 때처럼 함께 스노보드를 타러 갔다. 그리고 사업을 하자고 계속 말만 하기보다 “일단 저질러보자”고 의기투합했다.

비즈니스 아이템은 순수한 과일로 만든 음료인 스무디로 정했다. 1998년 여름, 세 친구는 시행착오 끝에 그들만의 첫 스무디를 개발했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이들은 런던의 작은 음악축제가 열리는 곳에 500파운드어치의 과일을 싸 들고 가 가판대를 세우고 스무디를 팔기 시작했다. 가판대 위에 ‘저희가 다니던 직장을 내팽개치고 스무디 장사를 해도 될 것 같습니까?’라는 글을 담은 현수막을 내걸었다. 한쪽 쓰레기통엔 ‘예(Yes)’, 또 한쪽 쓰레기통엔 ‘아니요(No)’라고 큼지막이 써놓고는 스무디를 사 먹은 고객들이 음료를 다 마신 후 빈 병을 원하는 쓰레기통에 버리도록 했다. 축제 마지막 날 ‘예’라고 쓰인 쓰레기통이 꽉 찼다.

세 친구는 그 즉시 사표를 냈다. 제품명에 대해 고민했다. ‘순수한’ ‘결백한’을 의미하는 ‘이노센트(innocent)’라는 단어를 회사와 제품 이름으로 쓰기로 했다. 천연과일 스무디를 개발하면서 사람들이 건강히 오래 사는 데 도움이 되는 맛있고 건강한 제품을 만들겠다는 다짐이었다. 촌스럽게, 노골적으로 제품을 알리는 대신 세련된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대표적 사례다.


○ 단어 몇 개가 일으킬 수 있는 엄청난 변화

스토리텔링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영국의 온라인 광고 컨설팅 업체 ‘퍼플 페더(Purple Feather)’가 제작한 유명 동영상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앞을 못 보는 걸인이 동냥을 하고 있다. 피켓에는 “나는 장님입니다. 도와주세요.(I‘m blind. Please help.)’라고 쓰여 있지만 다들 못 본 척 지나간다. 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한 여성이 맹인의 피켓 문구를 바꾼다. 갑자기 너도나도 걸인을 도와주기 시작한다. 바뀐 문구는? “아름다운 날이죠. 하지만 저는 그걸 볼 수 없네요.(It’s a beautiful day, and I can‘t see it.)”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 것처럼 단어 몇 개의 위력은 강했다.

스토리텔링을 하려면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그리고 전달 매체가 있어야 한다. 자본이 풍부하다면 TV 광고나 신문 전면 광고를 활용하면 된다. 신생 기업은 그럴 만한 금전적 여유가 없다. 이럴 때 구사할 수 있는 방법이 제품 그 자체를 고객과 대화하는 통로로 만드는 것이다. 사과, 바나나가 함유된 음료가 있다고 치자. 성분 표시를 어떻게 할까? ‘사과 함유량 몇 %, 바나나 약간’이라고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다. 사실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노센트의 감각은 남달랐다. ‘사과 3개 반, 바나나 반 개.’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유통기간도 ‘며칠까지 사용하세요(use)’가 아니라 ‘며칠까지 즐기세요(enjoy)’라고 표현한다. 어떤 유리병 라벨에는 글이 거꾸로 쓰여 있다. 뒤집어서 읽다 보니 ‘잘 흔들어서 마시라’는 내용이 나온다. 피식 하고 입가에서 웃음이 새어 나온다. 고객의 마음을 참 잘 읽는 회사임에 틀림없다.


○ 공익 마케팅의 새 장을 연 ‘빅 니트’ 캠페인

이노센트가 2003년부터 지금까지 지속해 오고 있는 ‘빅 니트’ 캠페인은 공익 마케팅의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캠페인은 ‘추운 스무디에 따뜻한 모자를 씌워주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우선 음료 병에 씌울 모자를 짠다. 이어 그 모자를 이노센트 또는 관련 기관에 보낸다. 이노센트는 제품에 모자를 씌운 뒤 유통시킨다. 소비자는 매대에서 제품을 구입한다. 보통 2파운드(약 4000원) 정도 하는 이 음료를 한 병 사면 그중 25펜스(약 500원) 정도가 자선단체로 전해진다. 기부금은 노인들을 위해 쓰인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우선, 털모자를 만드는 주체다. 캠페인을 시작할 때에는 자선단체의 도움을 받는 노인들이 뜨개질을 했다. 공짜로 도움을 받기보다는 무언가를 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도움을 받는 편이 노인들에게 더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노인들만 뜨개질을 할 필요는 없다. 캠페인 취지에 동조하는 사람은 누구나 니트를 짜서 자선단체나 이노센트로 보내면 된다. 도움을 받는 사람도,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이도 참여가 가능한 대의마케팅 모델이다.

다음은 털모자 모양이다. 여기서 엄청난 창의력이 발휘된다. 미니 마우스, 갈매기, 심지어 세계적인 육상 단거리 선수인 우사인 볼트 모양을 하고 있는 모자도 있다. 이 모자들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좋아진 기분은 고스란히 이노센트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진다. 캠페인의 시기가 겨울철이다. 불우이웃 돕기가 가장 활발한 계절이 겨울이고, 음료가 가장 안 팔리는 계절도 겨울이다. 이 시기에 캠페인을 실시하면 매출 증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실제로 이노센트는 빅니트 캠페인을 매년 겨울 특정 시기에만 실시한다. 이는 곧 털모자가 씌워진 스무디는 사시사철 볼 수 없는 ‘한정판’ 제품이라는 뜻이다. 훌륭한 마케팅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한정판이라고, 모자를 씌워놓았다고 더 비싸게 팔지도 않는다. 같은 가격에 귀여운 모자를 얻을 수 있고, 게다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온정의 손길을 줄 수도 있으니 소비자 입장에선 마다할 이유가 없다.


○ 스토리텔링의 힘

겨울철에 영국 슈퍼마켓에 가면 매장에 진열돼 있는 털모자를 쓴 이노센트 스무디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앙증맞은지 보는 순간 꼭 하나 사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난다. 심지어 이노센트라는 이름을 들으면 편안하고 행복한 기분마저 든다.

현재 이노센트는 세계적인 록 페스티벌인 ‘우드스톡’을 패러디한 ‘프루트스톡’을 만들어 후원하고 있다. 자신들에게 회사를 때려치우고 사업해도 된다는 용기를 심어준 여름 음악제를 기리며 신인 뮤지션들이 데뷔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다. 프루트스톡에 참석한 이들은 뮤지션, 관람객 할 것 없이 혼연일체가 돼 이노센트의 창업 당시 모습을 떠올릴 게 분명하다. 스토리텔링의 힘이라 할 수 있다.

2013년 코카콜라는 건강음료시장의 미래를 보고 이 회사의 대주주가 됐다. 지금까지는 창업자가 일궈 온 기존의 전통이 잘 유지되고 있다. 앞으로도 창업자의 경영 철학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신현암 삼성경제연구소 자문역 gowmi123@gmail.com


이 기사의 전문은 동아비즈니스리뷰(DBR) 192호(2016년 1월 1일자)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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