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추억이 숨쉬게… 파리 날리던 시장의 대변신

신민기기자

입력 2015-11-25 03:00 수정 2015-11-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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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카드, 광주 송정역전매일시장 새단장 한창

광주 광산구 송정역전매일시장이 현대카드 전통시장 활성화 프로젝트를 통해 ‘1913 송정역시장’으로 거듭난다. 가게 밖으로 말린 고추 더미며 플라스틱 통에 담긴 참기름, 고춧가루 분쇄기 등이 너저분하게 놓여 있던 ‘개미네고추방앗간’(위쪽 사진)이 24일 새 간판을 달고 다시 문을 열었다. 직접 짠 참기름 병을 들고 있는 방앗간 주인 김인섭 씨 뒤로 깔끔하게 정돈된 진열대가 보인다.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현대카드 제공
“오메, 뭔 쓰레기를 간판이라고 주워 왔다냐 했더만 이라고 본께 나름대로 멋이 있네요. 이제 우리 시장도 요로코롬 다시 살아나야지요.”

23일 광주 광산구 송정역전매일시장 개미네고추방앗간의 40년 된 기와지붕 밑에 새 간판이 달렸다. 옛 느낌이 물씬 나는 양철 간판에 ‘개미네 방앗간’이란 파란 글자가 선명했다. 김인섭(54) 박삼순 씨(52) 부부는 이곳에서 12년째 방앗간을 운영해 왔다. 김 씨는 시장 가까운 곳에 일군 1만6500m²(약 5000평)의 논밭에 쌀이며 밀, 고추농사를 짓고 있다. 농한기에 손놓고 쉬기가 좀 쑤셔 방앗간을 열었다. 개미처럼 부지런히 살고 싶은 마음에 가게 이름도 개미네다.

“김장철에는 고추 빻으러 단골들이 잊지 않고 찾아오는데, 평소에는 개미 한 마리도 안 보여요.” 시장 앞에 KTX 역사가 들어서면서 시장을 찾는 이들이 늘지 않을까 기대도 했지만 시장은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상인들은 점포를 버리고 인근 5일장으로 봇짐지고 장돌림을 하러 다녔다.

그렇게 서서히 죽어가던 송정역전매일시장이 요즘 시끄러운 공사음으로 가득하다. 굴착기가 바삐 오가며 낡은 도로를 뒤집고 전봇대가 뽑힌 자리에는 나무가 심어졌다. 현대카드의 ‘전통시장 활성화 프로젝트’ 때문이다. 현대카드는 올해 초 출범한 광주 창조경제혁신센터와 힘을 합쳐 송정역전매일시장을 ‘1913 송정역시장’으로 바꿔가고 있다.

‘1913’은 송정역전매일시장이 처음 생긴 해다. 100년 넘은 역사를 담아 특색 있는 시장을 만들겠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25일 시범 점포인 개미네 방앗간과 맞은편 ‘매일청과’가 문을 여는 것을 시작으로 내년 3월까지 시장 내 62개 점포가 새 단장을 마친다.

이 시장은 단순히 시설만 현대적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시장과 상인의 ‘이야기’가 살아있는 추억의 볼거리가 가득한 시장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오래된 간판은 보존 복원해 재활용하고, 새로 깔릴 도로에는 건물이 세워진 해를 돌에 새겨 넣을 예정이다. 개미네 방앗간의 빛바랜 파란 페인트칠도 깨끗이 청소만 해 그대로 남겼다.

매일청과 앞에는 점포의 역사와 가게 주인의 이야기가 담긴 미니 간판이 세워졌다. ‘그날그날의 신선한 제철 과일을 내 아이에게 먹이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한 과일 가게입니다.’ 오여순 씨(49)는 1998년 이곳에 과일가게를 연 이후 매일 새벽 청과물시장에서 제일 신선하고 맛좋은 과일을 떼 온다. 그가 정성껏 골라온 과일은 종이 상자 대신 전용 나무 바구니에 먹음직스럽게 전시됐다. 손님들이 한눈에 과일을 살펴볼 수 있게 비스듬한 진열장의 각도까지 섬세하게 계산됐다.

겉모습만 바꾼 것이 아니라 영업전략도 새로 짰다. 현대카드는 KTX 역사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단골손님에게 의존하던 판매방식을 관광객들에게도 적합한 방식으로 바꾸기로 했다. 개미네 방앗간 주인 김 씨가 직접 짠 참기름은 재활용 페트병이 아닌 ‘1913 송정역시장’ 로고가 박힌 전용 유리병에 담겼다. 고춧가루 미숫가루는 소포장해 시장을 찾은 관광객들이 기념품으로 구매할 수 있게 했다.

매일청과 한 편에는 주스 판매대가 들어섰다. 운송 과정에서 흠집이 생겨 상품가치가 떨어진 과일로 주스를 만들어 판매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걸 그냥 버릴 수도 없어서 주스로 만들어 동네사람들이며 단골에게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주스를 팔아 보자고 하대요.” 현대카드가 마케팅 전략을 짜기 위해 상인들과 수차례 인터뷰를 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했다.

상인들은 시장 골목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요즘 방식에 맞는 장사 기술도 새로 배우고 있다. 영업 교육은 ‘총각네 야채가게’가 맡았다. 총각네 야채가게는 야채 행상에서 시작해 대형 농산물 유통벤처기업으로 성장한 곳이다. 임천일 책임총각은 “장사를 수십 년간 해온 고수들인 만큼 청결이나 인사 등 이미 알고 있던 기본을 다시 일깨울 수 있도록 교육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카드는 이미 강원 봉평장, 광주 대인시장 등에서 전통시장 활성화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1913 송정역시장이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다. 시장을 둘러싼 이권 문제를 풀기 어려워서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도 페이스북을 통해 “현대카드가 전통시장을 돕는 마지막 프로젝트”라고 밝힌 바 있다.

광주=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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