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메드] 사도, 아버지와 자식의 이야기

입력 2015-11-19 17:58 수정 2017-01-10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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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아들을 왜 죽였는지 궁금하다. 사도가 왜 그렇게 돼야 했는지 답답하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영원한 숙제를 품고 미제 사건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그 애증의 시간이 우리를 상상의 나래로 이끌고 간다. 영화 사도는 그 위험한 관계에 대한 영화다.


칼럼니스트 최명기 정신과전문의




아버지라는 이름의 존속살인

사도를 보고 나서 자식을 죽인 왕이 누가 또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봤다. 일본 전국시대에 다케다 신겐(1521~1273)이라는 영주가 있었다. 중국에서 주나라 황실이 힘을 잃어 유명무실해진 후 춘추전국시대에 군웅이 할거하여 서로 왕이라 칭했듯이 당시 일본에서도 천황이 힘을 잃고 전국 영주들이 제각각 왕 노릇을 했다.

그러다가 다케다 신겐-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로 권력이 넘어가면서 통일이 되었다. 그런데 다케다 신겐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둘다 자신의 친아들을 죽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다케다 신겐은 자신의 장남인 요시노부를 반역죄로 몰아 자결시켰다. 지나친 의심 때문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식을 죽인 사연은 더 기막히다. 오다 노부나가와 다케다 신겐이 일본 쟁패를 놓고 대치하고 있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둘 중 한쪽에 붙어야 살아남는 형국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 쪽에 섰다. 오다 노부나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동맹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자신의 딸 도쿠히메를 이에야스의 장남 노부야스와 결혼을 시킨다.

그런데 오다 노부나가의 딸 도쿠히메가 시어머니와 남편이 다케다 신겐과 내통하여 반역을 꾀한다는 편지를 아버지 오다 노부나가에게 보낸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아내와 큰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오다 노부나가의 무력에 굴복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결국 아내와 큰아들을 처형함으로써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했다.

터키제국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던 10대 술탄 술레이만 1세는 제국의 안전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두 명의 아들을 죽였다. 우선 그는 1553년에 큰아들 무스타파를 죽였다. 큰아들 무스타파의 살인에는 왕비인 록셀란이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큰아들 무스타파는 록셀란의 자식이 아니었다. 록셀란은 자신의 아들이 왕위 계승자가 되게 하고자 무스타파가 반란을 일으킨다고 모함을 해서 술레이만으로하여금 무스타파를 처형하도록 유도한다.

그 와중에 술레이만과 록셀란 사이에서 낳은 아들 중 한 명인 Cihangir이 그 소식을 듣고 자살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남은 두 아들인 셀림과 바예지드가 내전에 돌입한다. 술레이만 1세는 셀림의 편을 든다. 1559년 전쟁에서 패배한 바예지드는 아들 네 명과 함께 페르시아로 도피한다. 술레이만은 페르시아를 지배하던 Safavid Shah에서 엄청난 금액을 제공한다. Safavid Shah는 그 대가로 바예지드를 터키의 사절단에게 넘기고 결국 바예지드와 그의 네 아들은 모두 목이 졸려 죽는다. 술래이만은 아들 두 명과 네 명의 손자를 죽인 것이다.

그렇다면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다케다 신겐, 도쿠가와 이에야스, 술레이만 1세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우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경우 오다 노부나가의 강요로 인해서 아들을 죽였다. 영조가 노론의 압력 때문에 사도세자를 죽였다고 가정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유사하다.

하지만 아무리 노론의 힘이 강력했더라도 과연 왕을 협박해서 왕자를 죽이게 할 수 있었을까? 만약에 영조가 노론이 무서워서 사도세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면 영조가 나중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왕이기 전에 아버지, 세자이기 전에 아들

그에 반해 다케다 신겐은 순전히 자기 의지로 아들을 죽였다. 누구도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고, 누군가의 꼬임에 빠진 것도 아니었다. 다케다 신겐의 의심이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영조가 단지 지나친 의심을 해서 사도세자를 죽였다면 다케다 신겐의 경우와 유사하다. 하지만 <사도>에서 묘사되었듯이 사도세자가 일정 부분 원인을 제공했다면 그것은 다케다 신겐의 경우와 다르다. 다케다 신겐의 아들은 반항을 꿈꾸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죽음을 강요받았다.


술레이만 1세가 큰아들을 죽인 데는 황후 록셀란의 계략이 한몫했다. <사도>에서도 후궁이 임신하면서 영조의 마음이 흔들린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조가 후궁에게 홀까닥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술레이만이 큰아들을 죽인 상황은 <사도>와는 다르다.

술레이만 1세가 서로 왕이 되겠다고 설쳐대는 두 아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은 어떠할까? 술탄이 지배하던 시대 터키에서는
형제 중 한 명이 왕이 되면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잠재적 왕위 계승자가 생존하는 경우 왕국이 불안해지고 분열의 불씨가 될 수 있기에 나머지 형제들과 그들의 아들은 모두 제거되고는 했다. 술레이만 1세는 두 아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반면 영조는 아들과 손자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했다.

어떤 점에서 영조는 손자를 살리기 위해서 아들을 죽인 것이다. <사도>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조가 자신 때문에 사도세자가 죽었다면서 오열하는 장면은 어떤 점에서 맞다. 손자가 없었다면 영조가 하나뿐인 아들을 죽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처음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TV 드라마인 <하늘아하늘아>를 통해서였다. 영조 역은 원로 배우 김성겸, 사도세자 역은 아직 20대였던 정보석 씨가 맡았다. 그 시절에는 영조의 광기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과 당시 재야세력인 소론의 권력투쟁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설정이 반영되기 시작했다. 영조는 임금이 되는데 있어서 노론의 도움을 얻었다. 그런데 사도세자는 개혁을 위해서 기득권층인 노론에 대항하고자 했다. 그러한 사도세자의 주위에 소론이 모이게 되었고 위협을 느낀 노론이 영조를 압박해서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거기에 세대갈등이 더해졌다. 기성세대는 청년세대가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고 부모와 국가에 의존한다고 여긴다. 반면 청년세대는 자신들이 기성세대의 뒤치다꺼리만 한다고 여긴다. 청년세대가 정조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노론과 기성세대를 동일시하면서 영화계에서는 박종원 감독의 <영원한 제국>, 출판계에는 이덕일의 <조선왕독살사건>, 브라운관에서는 드라마 <이산>을 비롯하여 정조를 소재로 한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다보니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위치 역시 점점 격상되기 시작했다. 젊은 관객들이 <사도>에 몰린 데는 이런 분위기도 작용했다. <사도>에서도 노론세력이 사도세자를 음해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사도>에서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을 단순히 보수 대 개혁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부자 관계의 갈등이 거기에 더해진다.


아버지도 살고 자식도 사는 기다림의 탈출구, 뒤주

인간이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동시에 개인적인 갈등은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이다.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의 갈등은 형제간 갈등인 동시에 아담과 카인 사이의 부자간 갈등이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누스를 죽이면서 탄생한다.

<사도>에서도 영조
와 사도세자 사이에 초래된 부자 갈등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그러면서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말들이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 오간다. 영조는 공부는 하지 않고 놀기만 한다고 사도세자를 나무란다. 영조는 자신이 직접 책을 만들어서 사도세자가 외우기를 기대한다. 직접 시험도 친다. 시험에 불합격한 사도세자에게 분통을 터뜨린다. 아는 것이 없으면 신하들이 무시할 것이라고 잔소리를 한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관객들은 공부해라,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하면 사회에서 무시 받게 된다는 부모의 잔소리를 떠올린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을 보면서 어느덧 부모와 자신의 갈등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젊은 관객들은 사도세자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직업이 정신과
의사인지라 영화를 보면서 사도세자의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진단해보게 되었다. 사도세자가 글을 잘 익히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학습장애였을 수도 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사람을 죽이고, 굿을 하고, 아버지 영조에 대해서 욕을 하고, 급기야 칼을 들고 영조를 죽이고자 하던 행동은 조증일 수도 있다. 거기에 알코올의존증이 겹쳤으리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고 3일이 지났을 때 있지도 않은 벌레가 보였던 것은 알코올 금단증상으로 인해서 발생한 진전섬망에 동반되는 환각이다.

그렇다면 영조의 진단은 뭘까? 뭔가 안 좋은 얘기를 들었을 때 귀를 씻는 것은 강박적 행동이다. 강박증의 가장 흔한 증상이 손 씻기다. 오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반복적으로 손을 씻게 되는데 심한 경우 손에 주부습진도 생긴다.

영조는 손을 씻는 대신 뭔가 괴로운 얘기를 들었을 때 귀를 씻는다. 좋은 일이 있을 때와 나쁜 일이 있을 때 사용하는 문이 다른 것 역시 강박적 행동이다. 그런데 강박적인 이들은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에 남에게 일을 맡기지 못한다. 따라서 대리청정은 영조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 이런 영조 밑에서 사도세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나이가 들면서 강박적 성향에 조기치매가 겹쳤을 수 있다.

조기치매는 피해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심한 경우 피해망상으로 이어진다. 강박증에 치매인 아버지와 조증에 알코올중독인 아들이 한집에서 산다고 생각해보자.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이 난다.

그런데 과연 영조는 처음부터 사도세자를 죽일 생각으로 뒤주에 가두었을까? 영화 속에서는 자식인 사도세자를 역적으로 만들면 왕인 영조도 역적이 되기 때문에 사약을 내리거나 참수를 하지 못한 것으로 나온다
. 그런데 어쩌면 단지 어쩔 줄 몰라서 영조가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며칠 밤낮을 잠도 안 자고 펄쩍펄쩍 뛰면서 난리를 치는 왕자를 어디엔가 가둬야 했다. 그런데 왕자를 옥에 가둘 수도 없다. 옥에 가두어도 계속 소리 지르고, 머리를 벽에 박고 자해를 했을 것이다.

막무가내인 상태에서 귀양을 보내도 탈출하기를 반복했을 터였다.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일단 뒤주에 가두고 제정신이 들기를 바랐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정신과 병동에 입원이라도 시킬 수 있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너무 폭력적인 경우 안정실에 격리한다. 격리 상태에서도 자해나 타해를 멈추지 않는 경우 억제를 한다. 그리고 약도 투약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정신질환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냥 사람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친 왕자를 일단 뒤주에 가둔 것이다. 그리고 왕자가 제정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매일 엄청난 술을 마시다 갑자기 중단하면 진전섬망이라는 생명을 위협하는 금단 증상이 발생한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후 비타민과 수액을 공급해서 치료해야 하는데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면 탈진해서 사망한다.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서서히 굶어 죽었기보다는 진전섬망으로 인해서 탈수와 탈진이 발생해서 급속히 죽음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친 왕자를 일단 뒤주에 가둔 것이다. 그리고 왕자가 제정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아버지를 버린 영조, 자식이기를 포기한 사도

<사도>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누구에게나 “나는 누구인가?”를 규정짓는 것들이 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이름이 뭔지, 부모는 누구인지 등등이 그것이다. 성장하면서 거기에 나는 뭐 하는 사람인지가 더해진다. “나는 학생이다”, “나는 가수다”, “나는 교수다” 등이 그에 해당된다. 그런데 왕과 왕자는 “나는 왕이다”, “나는 왕자다” 그 한 마디로 모든 것이 규정된다.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태어나면서 존재가 규정된 삶이다. “왕”이 되기 위해서 태어났고 “왕”이 되기 싫다고 안 할 수도 없다.

오로지 “왕”이 되기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왕”이 된다는 것, “왕위”를 유지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자
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고, 아들의 목숨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바라보면 이백년도 더 된 역사의 한 부분일 뿐이다. 역사책의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그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미치도록 싸웠건만 결국 모두 다 죽었다.

그들이 그토록 중요시했던 종묘사직도 이어지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사극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사극에는 모두 죽은 사람들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사극을 보다보면 나도 언제가 죽게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극을 보고 나면 세상에 중요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허무함이 밀려들기도 한다. 허무해지다 못해 조금은 우울해진다. 하지만 지금 나를 괴롭히는 일들 역시 언젠가는 모두 사라질 일들이라는 생각 역시 든다. 역설적으로 마음이 편해지기도 한다.

송강호의 영조 연기를 보면서 나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란>이 떠올랐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일본 중세 배경으로 각색한 <거미의 성>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그는 말년에 또다시 중세 일본을 배경으로 <리어왕>을 각색해서 <란>이라는 대작을 연출했다. 일본
의 명배우 나카다이 다츠야는 70세가 다 되어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었다가 배신당하고 몰락하는 성주 이치몬지 히데토라를 연기한다. 대단한 연기였다.

그런데 송강호의 영조 연기는 나카다이 다츠야의 리어왕 연기를 사뿐하게 능가한다. 하지만 자식을 죽이는 아버지 치고 송강호의 영조는 너무 이성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앞서 언급한 TV 드라마 <하늘아 하늘아>에서 배우 김성겸이 보여준 살짝 치매기가 있는 그리고 약간은 미친 듯한 영조가 그리웠다. 유아인의 사도세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감정을 느꼈다.

유아인의 표정 연기는 또래의 연기자 중에서는 따라올 이가 없다. 격렬하게 분노와 슬픔을 표현한다. 그런데 과연 사도
세자가 그토록 강렬한 인간이었을까? 그런 점에서 <하늘아 하늘아>에서 정보석이 보여준 조금은 더 수동적이고 조금은 더 불쌍한 사도세자가 왠지 그리웠다.

<사도>를 보고 나서 영화 속에 등장했던 미친 왕 중에서 “네로 황제”와 “조지 3세”가 떠올랐다. 어렸을 때 흑백 TV로 <쿼바디스>를 처음 봤을 때 주인공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이는 폭군 네로였다. 왕년의 명배우 피터 유스티노프가 네로를 연기했는데 지금도 눈에 선하다. <조지왕의 광기>는 정신과 레지던트 때 봤었다. 나이젤호손이 미친 조지 3세를 연기해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조지왕의 병을 진단해내려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었는데 결국 진단을 내리지 못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조지 3세는 포르피린증(porphyria) 환자였다. 포르피린증은 선천성 대사질환 중 하나인데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소변 색깔이 이상하다는 힌트가 영화 속에서 주어지는데도 포르피린증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하여튼 사도의 교훈은 국가 지도자가 미치면 국민이 피곤하다는 것이다.


기사제공 = 엠미디어(M MEDIA) 라메드 편집부(www.ramede.net)

* 본 기사의 내용은 동아닷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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