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치영]위기설은 왜 반복되는가

신치영 경제부 차장

입력 2015-08-18 03:00 수정 2015-08-1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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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치영 경제부 차장
1997년 외환위기는 필자에게 남다른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당시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재정경제원을 담당하면서 한동안 자괴감에 시달렸다. 국가경제 상황을 시시각각 지켜보고 위기 징후를 포착해 경고음을 울려야 할 경제기자의 책임을 방기했다는….

외환위기가 닥치기 전에 태국 밧화 폭락, 한보 및 기아 그룹 부도, 외신들의 한국의 외환위기 가능성 경고 등의 징후가 있었다. 그러나 국내외 금융시장에서 돌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설에 대해 정부 고위관료들은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부인했다. 국고에 든 달러가 바닥나기 직전까지도. “위기감을 부추기는 기사를 자제해 달라”는 공무원들의 당부에 마음이 흔들려 결국 위기 가능성을 경고하지 않았다. 결국 IMF의 구제금융을 받은 이후 전 국민이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걸 지켜보며 큰 후회를 해야 했다.

원래 ‘위기설’이란 걸 잘 믿지 않는 편이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위기설을 유포해 주식, 부동산, 통화 등 자산 가격이 떨어지면 그 틈에 이익을 보려는 투기세력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겪은 뒤부터 위기설이 나오면 근거에 설득력이 얼마나 있는지 살피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국내외 금융시장에 또다시 위기설이 돌고 있다. 이번에는 ‘9월 위기설’이다. 지난달 미국 월가에서 시작돼 한국, 일본 등 아시아로 번지고 있다. 근거는 2008년 12월부터 제로금리를 유지해온 미국이 올 9월 금리를 올리면 한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이 유동성 위기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중국의 위안화 절하 여파로 통화 가치가 떨어진 상태에서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통화 가치가 더 떨어지고 환차손을 우려하는 외국인들이 자금을 급격히 뺄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한국은 지난주 중국의 위안화 절하 이후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나라 중 하나다. 외국인들은 국내 코스피 시장에서 5일부터 13일까지 7거래일 동안 연속 순매도에 나서 8278억 원어치의 주식을 팔고 나갔다.

물론 미국이 금리를 올린다고 해서 당장 한국이 유동성 위기를 겪을 정도로 외화가 빠져나갈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위기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미국이 금리를 올리기 시작하면 신흥국들이 외국인 투자자들을 붙잡기 위해 앞다퉈 금리를 올릴 것이다. 한국도 금리를 올리지 않을 수 없다. 금리 인상은 가계의 이자 부담을 높일 것이다. 빚 상환 부담이 높아진 가계는 소비를 줄일 것이고 한계에 도달하면 집을 팔려고 내놓을 것이다. 소비가 얼어붙고 부동산 가격이 급락할 수 있다. 1100조 원에 이르는 가계부채를 한국 경제의 시한폭탄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위기설은 불안심리를 파고든다. 위기설이 확산된다는 건 경제주체들이 그만큼 불안해한다는 증거다.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저서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에 이렇게 썼다.

“경제의 왜곡을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악몽에 시달려야 한다. 경제가 장기침체에 빠지면 (사회적으로) 변화에 대한 요구가 나올 것이고 정치는 개혁가와 선동가가 경쟁하는 장이 될 것이다. 현명한 선택은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기 전 당장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개혁이야말로 유일하게 합리적인 방법이다.” 끊임없는 개혁을 통해 경제체질을 개선하는 것만큼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방법은 없다.

신치영 경제부 차장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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