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활의 시장과 자유]신격호와 구자경의 대조적 말년
권순활논설위원
입력 2015-08-05 03:00 수정 2015-08-05 15:16
권순활 논설위원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장수한 군주들이 말년에 총기가 흐려져 국정을 망친 사례가 적지 않다. 중국 한나라 무제나 청나라 건륭제가 그랬다. 두 사람은 나라를 강하게 만들었지만 만년에 아집과 독선, 변덕이 두드러지고 간신들을 중용해 국가와 백성의 부담을 키웠다. 이병철 삼성 창업자와 정주영 현대 창업자의 차이도 눈여겨볼 만하다. 한국이 배출한 걸출한 두 기업인으로 경영 성적표만 보면 막상막하다. 그러나 이병철은 세 아들의 능력을 검증한 뒤 3남인 이건희 회장을 후계자로 미리 낙점해 승계를 둘러싼 혼란을 막았다. 반면 80세가 넘어서도 모호한 태도를 취했던 정주영은 타계 한 해 전인 2000년 ‘왕자의 난’에 휘말리면서 힘겹게 일군 기업에도 상처를 입혔다.
집착과 ‘내려놓기’의 차이
올해 93세인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은 젊은 시절 일본에서 맨손으로 기업을 일으켜 모은 종잣돈을 바탕으로 1967년 한국에서의 사업을 시작했다. 최근 후계 분쟁에서 드러난 롯데가(家)의 행태와 불투명한 지배구조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다만 이 때문에 ‘신격호 롯데’가 48년간 만들어낸 수많은 일자리와 국가에 낸 세금, 경제적 부가가치를 통째로 무시하는 듯한 분위기가 확산되는 것은 걱정스럽다.
신격호의 최대 실책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뒤에도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영원한 현역 의식’이 지나치게 강했다는 점이다. 2011년 차남인 신동빈 부회장을 회장으로 승진시켰지만 총괄회장이란 직책에 앉아 여전히 그룹을 쥐락펴락했다. 두 아들이 모두 60세를 넘었지만 후계 구도를 위한 지분 정리를 미뤄 분란을 자초했다.
정주영이 ‘왕자의 난’ 때 보였던 건강상의 이상 징후도 감지된다. 신격호는 올해 초 장남인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을 모든 보직에서 해임했다. ‘한국 롯데는 신동빈, 일본 롯데는 신동주’라는 관측을 깬 결정이었다. 지난달 12일 신동빈이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로 선임돼 ‘신동빈 체제’가 굳어지나 싶더니 불과 보름 뒤 신격호는 다시 장남과 손잡아 혼란을 부추겼다. 하루에도 변덕이 죽 끓듯 하고 본인의 말과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정상적 판단능력을 상실했을 때 나타나는 노인성 질환의 대표적 증상이다.
롯데가의 진흙탕 싸움을 보면서 올해 90세인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을 떠올렸다. 구인회 창업자의 뒤를 이은 2세 경영인이지만 사실은 20대부터 부친과 함께 산전수전을 겪으며 기업을 키운 1.5세대라고 할 수 있다.
반면교사와 벤치마킹 대상
구자경은 자신이 만 70세, 장남인 구본무 현 회장이 50세였던 1995년 스스로 회장에서 물러났고 이후 아들의 경영에 간섭하지 않았다. LG에서 GS가 분리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나오지 않게 만든 숨은 주역도 그였다. 어느 경제계 인사는 “지금도 구 명예회장이 가끔 곤지암 골프장을 찾으면 LG는 물론이고 GS 임원들도 달려가 90도로 인사할 만큼 진심 어린 존경을 받는 원로”라고 전했다.
명나라 중기의 명신(名臣) 유대하는 “한 사람의 삶은 관 뚜껑을 덮고 난 후에 논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재일동포 성공신화의 주역 신격호는 말년의 집착 때문에 개인과 회사가 모두 치명타를 입었다. 반면 구자경의 결단은 LG를 대기업 중에서 드물게 집안싸움을 겪지 않게 만든 소중한 밑거름이 됐다. 고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한국의 기업인들에게 신격호는 반면교사(反面敎師), 구자경은 벤치마킹의 대상이 될 만하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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