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2000억 빚내서 무상보육

동아일보

입력 2013-09-06 03:00 수정 2013-09-0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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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채 발행 추진… 정부에 인수 요구

재원 고갈로 인한 영유아 무상보육 중단 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서울시가 결국 지방채 발행이라는 고육책을 내놓았다.

0∼5세 영유아 무상보육을 모든 소득계층으로 확대키로 한 정치권의 지난해 대선 전 합의에 따라 올 초부터 이 제도가 시행된 뒤 전국 광역지방자치단체들의 무상보육 재원난은 갈수록 악화돼 왔고 결국 지방채 발행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특히 무상보육 비용을 국고에서 지원받는 비율이 낮은 서울시의 고민이 컸고, 결국 박원순 시장은 2000억 원가량의 빚을 내 보육비를 마련하기로 한 것이다. 정부도 1423억 원에 달하는 국고 부담분을 바로 집행하겠다고 밝혔다. 이로써 서울시의 ‘보육대란’은 일단 피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파국의 불씨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무상보육 사업의 국고 보조 비율을 현재보다 20%포인트 높이는 내용의 영유아보육법 개정안 처리가 여전히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경기 침체와 취득세율 인하에 따른 세수 감소로 지자체들의 호주머니 사정이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어 끝내 법 개정이 무산되면 보육대란은 내년에 전국으로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박 시장은 5일 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방채 발행 및 추가경정예산 편성 계획을 밝혔다. 박 시장은 이날 “무상보육을 위한 지방채 발행은 올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돼야 한다”며 “더는 지방 재정을 뿌리째 흔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서울시의 지방채 발행은 2009년 금융위기 때 6900억 원을 발행한 이후 4년 만이다.


▼ 지자체 재정난에 내년 보육대란 예고 ▼

올해 서울시의 무상보육 소요 예산은 총 1조656억 원. 그러나 시에서 책정한 예산은 6948억 원으로 3708억 원이 부족했다. 정부는 서울시에 무상보육 추경 예산을 편성하지 않으면 국고 지원을 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박원순 시장은 추경을 거부하며 맞서 왔다. 박 시장은 시내버스와 지하철역 등에 “무상보육은 반드시 이어져야 한다”며 정부의 책임을 지적하는 광고를 하며 여론전을 펼치기도 했다.

서울시는 일단 지방채 발행과 정부 지원금 등으로 연말까지 무상보육 재원을 충당할 계획이다. 지방채 발행 규모는 약 2100억 원까지로 늘어날 수 있다. 서울시는 지방채를 발행할 경우 정부가 공적자금으로 인수해 줄 것을 요청했다. 과거에도 서울시가 발행한 지방채를 정부가 이자 없이 사들인 바 있다. 이에 대해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지방채) 인수 자체는 충분히 가능하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국가복지사업 시행을 위해 지자체가 지방채를 발행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지방채 발행 결정으로 표면적으로는 서울시가 정부의 요청에 한발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부와 서울시 안팎에서는 이번 결정을 ‘협상용’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서울시가 극단적인 상황을 피하면서 정부에 영유아보육법 개정을 압박하려 한다는 것이다.


○ 내년 전국에 ‘보육대란’ 우려

서울시의 무상보육 논란은 이미 예고된 것이다. 정치권이 표심 얻기에 급급한 나머지 원칙도 기준도 없이 무상보육 대상을 확대한 것이 발단이었다.

1991년 관련법이 제정될 당시만 해도 영유아보육사업은 저소득층 지원이 목적이었다. 당시 국고보조 비율이 서울은 20%, 다른 지자체는 50%였다. 문제는 영유아보육사업의 대상이 올해부터 전 계층으로 확대된 이후에도 국고보조비율이 바뀌지 않은 것이다. 2008년만 해도 영유아보육사업 대상은 약 59만 명으로 지방에서 부담하는 비용은 총 8409억 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올해부터 0∼5세로 무상보육이 확대되면서 지원 대상은 225만 명에 달하고 지자체 부담은 3조5000억 원으로 껑충 뛰었다.

반면 영유아보육사업보다 늦게 1999년 도입된 기초생활보장의 국고보조비율은 서울 50%, 지방 80%다. 또 2007년 시행된 기초노령연금은 국고보조 비율이 평균 75%에 이른다.

기존의 0∼2세에 맞춰 예산을 편성했던 지자체들은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부랴부랴 정부가 특별교부세 등을 내려 보내기로 했지만 전체 비용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지자체의 강력한 요구에 정치권이 화답하면서 국고보조 비율을 서울시 40%, 다른 지자체 70%로 높이는 개정안을 마련했지만 기재부 등의 반대로 현재 국회 법사위에 10개월째 계류 중이다.

지자체들은 개정안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내년에 전국적인 보육대란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인천시 관계자는 “무상보육을 지속하려면 현재 시에서 추진 중인 주요 사업 일부를 아예 재검토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말했다.

경기도는 무상보육 등 다른 복지사업을 유지하는 대신 800억 원가량의 내년도 무상급식 예산을 삭감하기로 했다. 경기도 관계자는 “세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무상급식 지원을 계속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영유아보육과 저소득층 아동에 대한 지원은 계속 유지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법 개정과 관련해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정부 내 협의가 진행 중인 만큼 충분한 논의를 바탕으로 정기 국회에서 처리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재부 관계자는 “중앙이나 지방 모두 세금이 걷히지 않아 재원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이라며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지원하기가 어려운 국면이라 이해관계 조정이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영유아보육법 개정안 통과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의미다.


○ 지원 축소와 증세 가운데 선택해야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취득세 영구 인하 방침(8·28 대책)은 이런 상황에 불을 질렀다. 8·28 대책은 주택 구입 때 내는 취득세율을 6억 원 미만, 6억∼9억 원, 9억 원 초과 등 3구간으로 나누고 각각 1, 2, 3%씩 세금을 매기는 것. 한국지방세연구원에 따르면 8·28 대책으로 인한 지자체의 세수 손실이 약 2조3807억 원으로 추정됐다. 1억 원 미만 주택 거래분을 제외하면 약 1조9890억 원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취득세 감소분 보전을 위한 방안으로 지방소비세율 인상을 꼽았다. 지방소비세는 국세인 부가가치세에서 5%를 떼어내 지방에 주는 것. 중앙정부의 몫은 줄어들지만 국민의 추가 세 부담은 없다. 지방소비세를 6.4% 인상하면 취득세 감소분을 충당하고 추가로 5%를 올리면 새 정부 복지사업 확대에 따른 지방 부담액(연평균 4조6000억 원)을 충당할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중앙재정의 손실이 불가피하다. 일부에서는 복지정책 수혜 대상을 그대로 유지하는 대신 소득에 따라 차등 지급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능식 한국지방세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방재정 측면에서 지방소비세 인상이 시급하지만 결국은 같은 돈을 다른 경로로 쓰는 것에 불과하다”며 “국가 전체의 재정 측면에서 볼 때 증세 등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성호·조영달 기자·세종=홍수용 기자 star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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