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이슈]세계 13위 부자… 3선 뉴욕시장…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동아일보

입력 2013-08-31 03:00 수정 2013-08-31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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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1월 퇴임 앞둔 블룸버그 뉴욕시장 스토리

‘세계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가장 큰 억만장자.’(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

‘시장이라는 직업의 위상을 완전히 바꿔놓은 인물.’(영국 일간지 가디언)

‘행정가로도 경영자로도 모두 일류.’(미국 시사주간지 뉴요커)

마이클 블룸버그 미국 뉴욕 시장이 2002년 1월부터 12년간 받아온 호평들이다. 미국 최대 도시인 뉴욕의 시장인 그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 버금가는 정치 아이콘이다. 특히 올해 말 퇴임을 앞두고 베일에 가린 그의 성공 스토리와 앞으로의 행보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블룸버그 시장은 올해 3월 기준 270억 달러(약 30조1320억 원. 포브스 추정)의 재산을 지닌 세계 13위 부자다. 그는 민주당 공화당 무소속을 자유롭게 오가는 독특한 정치 행보, 통 큰 기부 등으로 3선 연임 기간 내내 화제를 모았다.

공식 퇴임일은 내년 1월 1일이지만 올해 11월 5일 새 시장을 뽑는 선거가 있어 사실상 남은 임기는 두 달 정도다. 재임 기간에 그는 만성적인 뉴욕의 재정적자를 해소하고 강도 높은 개혁을 단행한 끝에 대권 주자 반열에 올랐다.

그는 ‘막대한 부’와 ‘정치적 권력’을 동시에 갖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통설을 뛰어넘었다. 성공한 경영자에서 성공한 행정가이자 정치인으로까지 변신한 그가 다음엔 어디에 발을 담그고 어떤 스토리를 만들어낼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수줍은 시골뜨기가 대학 리더로

블룸버그는 1942년 미국 보스턴 근교에서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 후손으로 태어났다. 부동산 중개인 아버지와 전업 주부 어머니 슬하의 평범한 가정환경, 작고 왜소한 체구를 지닌 소년은 다른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존재였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우연히 한 전자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한 경험이 인생의 큰 자산이 됐다. 당시 전자 회사 사장은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 있는 명문 존스홉킨스대의 박사 출신이었다. 그 사장은 블룸버그가 존스홉킨스대 전기공학과를 지원할 때 추천서를 써줬다.

블룸버그는 대학 입학 당시를 회상하며 “내가 죽어서 천국에 온 줄 알았다. 내가 자란 곳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 압도됐다”고 말했다.

수줍음을 타는 시골뜨기였던 그는 여기서 대학의 리더로 활약한다. 먹성 좋은 젊은이들의 성에 차지 않는 빈약한 학교 저녁 식단을 바꾸기 위해 주방장에게 줄 돈을 모금하는 일에 앞장섰다. 실험실 동료들에게 과제물을 분배하고, 대학생들의 문란한 캠퍼스 생활을 지적하는 지방판사에 맞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일을 거치면서 그는 교내 스타가 됐다.

요즘도 그는 “내가 무엇인가를 주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그때 처음 알았다. 존스홉킨스에서의 경험은 정말 특별했다”고 말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이 대학에 기부로 보답하고 있다. 졸업 다음 해인 1965년 5달러 기부를 시작으로 올해 1월 3억5000만 달러를 보냈다. 지금까지 이 대학에 기부한 돈은 모두 11억 달러(약 1조2276억 원). 단일 교육기관에 대한 개인 기부금으로는 지금까지 최대 규모다.


해고 통보를 세계적 대부호의 발판으로

블룸버그 단말기
대학 졸업 후 고향 보스턴으로 돌아와 하버드대 경영학석사(MBA)까지 마친 블룸버그는 금융의 중심 월가에 뛰어들었다. 1966년 채권거래의 명가(名家) 살로먼브러더스의 중개인이 된 그는 매일 12시간 이상 일하는 근성을 보였다. 그는 최근 뉴욕 시장 임기 종료를 앞두고 “성공을 위해서 화장실 가는 것도 참았다”며 성공 비결을 말했다가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그렇지만 월가에서 일벌레는 성공의 필요조건이었다. 그는 하루의 반을 월가에서 일한 끝에 6년 만에 살로먼의 파트너로 승진하고 젊은 나이에 백만장자가 됐다.

그런데 살로먼에 입사한 지 꼭 15년이 되는 1981년 회사 합병 과정에서 파벌 다툼에 휘말려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았다. 퇴직금 1000만 달러를 받았지만 서른아홉의 블룸버그는 월가에서 새로운 자리를 찾을지, 전혀 다른 일을 해야 할지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 놓였다.

그가 택한 길은 창업이었다. 수익의 원천은 금융회사와 가까운 분야에서 찾기로 했다. 투자자에게 꼭 필요한 금융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단말기를 만들어 판다는 것이 그의 아이디어였다. e메일과 인터넷이 없던 시절 ‘금융가에 떠도는 각종 투자 관련 뉴스와 지수 등을 신속하게 모아 고객들에게 전달한다’는 그의 생각은 당시에는 그야말로 혁명적이었다. 회사 이름도 혁신적인 발상에 걸맞게 ‘혁신 시장 시스템(Innovative Market System·IMS)’이라고 붙였다.

1982년 메릴린치가 22대의 IMS 단말기를 설치하고 3000만 달러를 투자하면서 ‘창업가’ 블룸버그의 제2의 성공 신화가 시작됐다. 사람들은 간단한 단말기 조작으로 대량의 투자정보를 손쉽게 볼 수 있다는 점에 열광했고 회사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을 거듭했다. 블룸버그는 1987년 자신의 이름을 따 회사 이름을 블룸버그로 바꿨다. 그 후에도 금융회사의 입맛에 꼭 맞는 각종 서비스를 속속 선보이며 사세를 키웠다.

블룸버그사(社)는 이제 단순한 금융정보 서비스 회사가 아니라 통신 케이블TV 라디오 잡지 등 거의 모든 형태의 매체를 보유한 미디어 제국으로 자리를 굳혔다. 2012년 말 블룸버그 단말기는 전 세계에 31만 대나 깔렸으며 한국에서도 이 단말기가 없는 금융회사 사무실을 찾아보기 어렵다.

블룸버그는 세계 13위 부자로 뛰어올랐다. 그는 회사를 아직도 상장하지 않았다. 그가 보유한 회사 주식 지분은 88%. 미 경제전문지 비즈니스인사이더가 평가한 블룸버그사의 기업 가치는 350억 달러(약 40조6000억 원)로 비상장기업 가운데 중국 전자상거래회사 알리바바(400억 달러)에 이어 세계 2위다. 지금도 엄청난 부자지만 기업공개(IPO)를 하면 부호 순위에서 더 올라간다.


“돈 말고 정치로 세상을 움직이고 싶다”

사업가로 이룰 것을 다 이룬 블룸버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정치였다. 9·11테러를 잘 수습해 뉴욕 시민의 우상으로 떠오른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 시장이 건강 문제로 시장 직에서 갑자기 물러나자 지인들이 출마를 권유했고 그의 마음도 흔들렸다.

정치의 세계는 위험이 따른다. 샐러리맨에서 창업가로 변신한 뒤 또 다른 선택을 할 때 블룸버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평소에 하는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살아가면서 안전한 길로 갈지, 꿈을 좇을지에 대해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한다. 안전한 길을 택한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당신의 잠재력이 깨어나지 않는다.”

블룸버그가 2001년 11월 첫 번째 시장 선거에서 승리한 과정도 지금까지 다른 정치인들이 실험하지 않은 혁신의 연속이었다. 2000년까지 민주당원으로 활동했던 그는 민주당 텃밭인 뉴욕에 너무 많은 민주당 시장 후보가 난립해 후발 주자인 자신이 당내 경선을 이기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과감히 공화당으로 당적을 바꿨다. 등록 유권자의 68%가 민주당원인 뉴욕에서 공화당 시장 후보로 나선 것이다.

뒤늦게 뛰어든 바람에 초반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7300만 달러를 선거비로 쏟아부으면서 특유의 뚝심으로 표밭을 다졌다. 당시 그는 “정치인이 각종 로비와 이권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돈이 많아야 한다”며 색다른 호소로 유권자의 관심을 끌었다. 22만5000달러의 시장 연봉을 1달러만 받겠다는 공약도 내놨다. 낙태 및 동성애 찬성, 총기규제 반대 등 공화당 후보와 달리 민주당 색채를 입힌 정책을 내세워 민주당 표를 흡수해 나갔다.

2002년 1월 108대 뉴욕 시장으로 정식 취임한 블룸버그는 기업가의 노하우를 시정에 활용했다. 처음 내놓은 정책은 재정적자 해결을 위한 부동산세 인상. 2002년 초 뉴욕 시의 재정적자는 60억 달러에 이르렀고 한 해 전 발생한 9·11테러로 시의 주요 수입원인 관광수입도 최악이었다. 70%를 넘나들던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졌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세수 확대로 시 재정이 흑자로 돌아서자 이 돈으로 뉴욕 시 홍보를 강화했고 24시간 시민들의 민원 전화를 받아 신속하게 처리하는 체제도 갖췄다. 9·11테러 이후 암울했던 뉴욕 분위기는 생기가 돌았고 관광객도 급증했다. 매년 뉴욕을 찾는 관광객은 약 5200만 명으로 뉴욕 시 인구 834만 명의 6배가 넘는다.

시장이 직접 언론, 시의회, 선출직 관료 등에 매년 3차례 예산 현황을 보고한 것도 그가 처음이다. 그는 시의회에서 복잡한 숫자가 한눈에 쏙쏙 들어오는 각종 차트와 표를 담은 자료를 사용했다. 바로 ‘CEO형’ 발표다. 시의회의 예산 협조도 쉬워졌고 여론도 한층 우호적으로 변했다. 결국 블룸버그는 2005년 11월 20%포인트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율 차이로 민주당 후보를 다시 물리치고 재선에 성공했다.


초당파 정치인의 본격 정치 실험

재선 이후 블룸버그는 초당파 정치인이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통해 자신의 위상을 다지기 시작했다. 그는 2007년 6월 공화당도 탈당했다. 낙태, 동성 결혼, 총기 규제, 줄기세포 연구 등 주요 정책에서 사사건건 공화당과 갈등을 빚은 데다 보수 색채가 강한 존 로버츠 대법원장 선임을 둘러싸고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과도 날을 세운 그는 그 후부터 지금까지 무소속으로 지내고 있다.

당리당략이 우선인 워싱턴 정치에 실망한 그는 자신의 돈으로 정치판에 변화를 불러일으키겠다고 결심했다. 우선 낙태 및 동성 결혼 지지, 총기 규제 등에서 자신과 뜻이 맞는 정치인과 시민단체에 대해 당적에 관계없이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대선 후보나 상하원 의원 후보와 같은 거물뿐 아니라 주 의회 의원, 지방판사 등도 알음알음 지원해오던 그는 지난해 10월 연방 선거법의 규제를 받지 않고 무제한적으로 선거자금을 지원하는 조직인 슈퍼 팩(Super PAC)도 출범시켰다.

공공장소의 담배 및 탄산음료 판매 제한, 엄마 젖먹이기 운동, 엘리베이터 운행 제한 등 반발이 예상되는 정책도 끝까지 밀고 나갔다. 2007년부터 전 세계 금연단체에 6억 달러(약 6700억 원)를 내놨고, 카네기재단 등 각종 문화단체에도 2억 달러가 넘는 돈을 기부했다. 지난해엔 동성 결혼 합법화 운동단체에 25만 달러, 올해엔 4월 미국 2위 도시 로스앤젤레스 공교육 개혁 추진단체에도 35만 달러를 냈다.

포브스는 그의 기부액이 10억 달러(약 1조1160억 원)가 넘는다고 추정했다. 사후(死後) 기부를 택한 많은 대부호와 달리 바로바로 기부하는 것도 남다르다. 블룸버그는 ‘대부호들이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자’는 취지의 기빙 플레지(Giving Pledge)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대선 출마냐 자연인이냐

지독한 ‘일벌레’였던 마이클 블룸버그 미국 뉴욕시장은 일에 파묻혀 살다가 1993년 부인 수전 브라운과 이혼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2000년 한 기금 모금 파티에서 열세 살 연하의 다이애나 테일러 씨(왼쪽)를 만나 지금까지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뉴욕데일리뉴스
성공적인 시장 경력 덕분에 블룸버그는 2008년, 2012년 미 대선 때 모두 출마설에 올랐다. 그는 “키 작은 유대인 이혼남인 내가 대선에서 이길 수 있느냐”며 부인했다.

그의 출마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결국 돈으로 표를 샀다’며 그를 비난하고 있다. 흡연, 탄산음료, 트랜스지방 제한에 관한 각종 건강 정책 때문에 ‘유모(Nanny) 시장’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도 붙었다. 유모가 어린아이를 돌보듯 시민의 일상생활을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한다는 의미다. 특히 그가 올해 초 시 곳곳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고 불심 검문을 상시화해 범죄를 예방하겠다고 밝히자 반대론자들이 폭발했다. 이들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속 빅브러더(Big Brother)가 재림했다”고 발끈했다.

법을 개정해 뉴욕 시장 3선에 성공한 것도 논란의 대상이다. 2009년 11월 3번째 시장 선거 당시 4년 중임만 가능하다는 뉴욕 시 법의 공직자 임기 제한에 직면한 그는 1억20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 선거 자금을 풀어 여론을 무마한 후 시의회를 통해 법을 개정했다. 당시 뉴욕타임스(NYT)는 “그가 3차례 시장 선거에 사용한 돈이 2억5000만 달러가 넘어 해리포터 영화 제작비와 맞먹을 정도”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경제난으로 워싱턴 정치에 대한 유권자의 회의감이 팽배한 상황에서 무소속 정치인의 행보가 참신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NYT는 “예측 불가능한 도시인 뉴욕이 그의 휘하에서 놀라울 정도로 잘 돌아가고 있다”며 띄워주기도 했다.

재산세 인상, 흡연 제한, 자전거 도로 개설 등 블룸버그가 추진한 주요 정책은 시행 당시에만 반발이 거셌을 뿐 이제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주요 도시가 따라 하고 있다. 그가 샐러리맨으로도 정치인으로도 그 누구의 배경이나 지원 없이 성공했다는 점 또한 자수성가를 중시하는 미국인의 표심을 자극한다.

미국 언론은 “슈퍼 팩 창설은 블룸버그가 시장 퇴임 후에도 국가 정책에 영향력을 미치겠다는 분명한 메시지”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가 ‘행동하는 영웅의 새로운 롤모델’이 될지, 아니면 자연인으로 돌아갈지 벌써부터 전 세계 70억 인구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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