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Up]구치의 ‘명품 장학사업’
동아일보
입력 2013-02-28 03:00 수정 2013-02-28 03:00
한국 패션 꿈나무 5명, 이탈리아 패션쇼에 초청 받은 비결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에 순간 귀를 의심했다. 세 번이나 다시 전화를 걸어 제대로 전화한 게 맞는지 물었다. 이런 행운이 찾아올 줄이야.
최혜진 씨(21·한양대 섬유디자인과 4학년)는 20일(현지 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구치 사무실에서 열린 장학증서 수여식에서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구치의 최고경영자(CEO)인 파트리치오 디 마르코 사장(52)이 축하한다며 어깨를 토닥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구치는 해외 유명 브랜드 가운데 처음으로 한국 소외계층의 패션 전공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사회공헌 활동을 올해 시작했다. 5년간 매년 5명씩 뽑아 1년 치 학비를 준다. 올해 수혜자가 된 학생 5명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리는 구치 패션쇼와 피렌체 구치 본사에 초대됐다. 한국장학재단과 함께 학업 성적과 가정환경을 고려해 1차로 15명을 추린 뒤 2차 실기시험을 통해 5명을 선발했다. 경쟁률은 30 대 1이었다.
소원영(24·국민대 의상디자인과 4년), 송윤정(21·동서대 패션디자인학부 4년), 김지영(22·단국대 패션산업디자인과 4년), 장애정 씨(21·충남대 의류학과 3년)와 최 씨가 최종 선발돼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 어렵게 시작한 패션학도의 길
전북 군산 출신인 최 씨는 고등학생 때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했다. 서울에 올라갈 기회가 있을 때면 고향에서 구하기 힘든 컬렉션북을 사서 바리바리 싸 들고 돌아왔다. 대학에 진학할 무렵 시련이 찾아왔다. 당연히 패션 관련 학과에 가려고 결심했던 최 씨에게 아버지는 조용히 물었다. 미안한 마음에 술의 힘을 빌려….
“형편이 안 좋아졌으니 대학은 동생에게 양보하고 동생 뒷바라지를 해 주면 안 되겠니?”
한 살 아래인 남동생은 공부를 무척 잘했다. 이렇게 꿈이 끝나나 싶었다. 그런데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아 섬유디자인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같은 과 학생 중에는 집안 형편이 좋은 친구들이 많았다. 학기가 끝날 때마다 친구들은 한두 명씩 해외로 유학을 떠났다. 가슴속에 패션 선진국에 대한 동경만 쌓여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과 사무실 앞에서 ‘구치 장학생’을 선발한다는 안내문을 보게 됐다.
구치 장학생으로 선발된 학생들은 다들 최 씨와 비슷한 사연을 지니고 있었다. 어려운 환경이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매 학기 성적 장학금을 휩쓰는 모범생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대학생들이 대부분 해외 연수를 다녀오는 요즘 이들 5명 가운데 4명은 이번에 난생처음으로 외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것도 그렇게 동경하던 ‘명품’의 본고장, 이탈리아를 찾은 것이다.
청일점인 소원영 씨는 지난 학기 모든 과목에서 ‘A+’ 학점을 받았다. 고3 때 진로를 결정해 미술 공부를 뒤늦게 시작했다. 형편이 넉넉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친구 부모님의 도움으로 미술학원을 소개받아 학원비를 할인받았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줄곧 이 미술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며 용돈을 벌었다.
장학생 선발을 위한 2차 미션은 3시간 안에 구치의 유명 핸드백 모델인 ‘뱀부백’을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소 씨는 죽부인을 디자인 모티브로 한 작품을 선보였고 구치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프리다 자니니는 “독창적인 아이디어”라고 칭찬했다.
경남 창원 출신인 송윤정 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교복업체가 중고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미래형교복공모전에서 대상을 탄 디자인 인재였다. 그때 받은 상금으로 미술학원에 다닐 수 있었다. 송 씨는 “원래부터 가장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구치의 프리다 자니니였는데 구치 본사를 직접 방문하니 꼭 그와 함께 일하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 후회 없는 삶을 위하여
송 씨는 디 마르코 사장에게서 장학증서를 받는 자리에서 감사 카드를 전달했다. 가격이 비싸 몇 번을 망설이다가 샀다는 예쁜 카드에 깨알 같은 글씨로 감사의 마음을 담았다.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손으로 꾹꾹 눌러 쓴 카드를 펴 본 디 마르코 사장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샴페인을 곁들인 다과회장에서 그는 자신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학업을 이어 왔다고 고백했다.
“만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부모님이 지원해 줄 형편이 못 됐습니다. 일본 문학으로 진로를 바꿨죠. 그러나 역시 이걸로는 돈을 벌기 쉽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어 경영으로 진로를 또 바꿨습니다.”
“우리 나이대인 20대 초반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학생들의 질문에 디 마르코 사장은 “그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꿈을 끝까지 좇을 용기가 없었다는 점이 가장 후회된다”고 말했다. 그는 “경영인은 이렇게 말로 표현하는 재주밖에 없지만 여러분은 디자인이라는 재능을 타고났으니 더 유리한 것 아니냐”며 “이런 재능을 갖게 해주고 꿈을 위해 나아가는 걸 막지 않으셨던 부모님께 감사하라”고 전했다.
그는 또 학생들에게 구치의 아동복 라인인 ‘구치 칠드런’에 한국인 디자이너가 근무하고 있다고 전하며 “글로벌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선 세계를 향해 눈을 열고, 한국적 유전자를 가슴 깊이 간직하라”고 조언했다.
귀국행 비행기에서 이들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장애정 씨는 “왠지 가슴이 벅차기도 하고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김지영 씨는 “패션 대기업에 취업해 아동복 디자인을 하며 안정된 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패션 선진국을 직접 보니 더 큰 꿈을 품게 됐다”며 “글로벌한 환경에서 세계의 디자인 인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밀라노=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한국의 패션 전공 대학생 5명이 이탈리아 유명 패션 브랜드 구치가 올해 처음 선발한 ‘구치 장학생’으로 뽑혀 이탈리아 밀라노의 구치 사무실에서 장학증서를 받았다. 왼쪽부터 소원영, 장애정, 최혜진 씨, 구치 본사의 파트리치오 디 마르코 사장, 윌리엄 윤 구치코리아 대표, 김지영, 송윤정 씨. 구치코리아 제공
“구치 장학생으로 최종 선발되셨습니다. 축하합니다.”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에 순간 귀를 의심했다. 세 번이나 다시 전화를 걸어 제대로 전화한 게 맞는지 물었다. 이런 행운이 찾아올 줄이야.
최혜진 씨(21·한양대 섬유디자인과 4학년)는 20일(현지 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구치 사무실에서 열린 장학증서 수여식에서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구치의 최고경영자(CEO)인 파트리치오 디 마르코 사장(52)이 축하한다며 어깨를 토닥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구치는 해외 유명 브랜드 가운데 처음으로 한국 소외계층의 패션 전공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사회공헌 활동을 올해 시작했다. 5년간 매년 5명씩 뽑아 1년 치 학비를 준다. 올해 수혜자가 된 학생 5명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리는 구치 패션쇼와 피렌체 구치 본사에 초대됐다. 한국장학재단과 함께 학업 성적과 가정환경을 고려해 1차로 15명을 추린 뒤 2차 실기시험을 통해 5명을 선발했다. 경쟁률은 30 대 1이었다.
소원영(24·국민대 의상디자인과 4년), 송윤정(21·동서대 패션디자인학부 4년), 김지영(22·단국대 패션산업디자인과 4년), 장애정 씨(21·충남대 의류학과 3년)와 최 씨가 최종 선발돼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 어렵게 시작한 패션학도의 길
전북 군산 출신인 최 씨는 고등학생 때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했다. 서울에 올라갈 기회가 있을 때면 고향에서 구하기 힘든 컬렉션북을 사서 바리바리 싸 들고 돌아왔다. 대학에 진학할 무렵 시련이 찾아왔다. 당연히 패션 관련 학과에 가려고 결심했던 최 씨에게 아버지는 조용히 물었다. 미안한 마음에 술의 힘을 빌려….
“형편이 안 좋아졌으니 대학은 동생에게 양보하고 동생 뒷바라지를 해 주면 안 되겠니?”
한 살 아래인 남동생은 공부를 무척 잘했다. 이렇게 꿈이 끝나나 싶었다. 그런데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아 섬유디자인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같은 과 학생 중에는 집안 형편이 좋은 친구들이 많았다. 학기가 끝날 때마다 친구들은 한두 명씩 해외로 유학을 떠났다. 가슴속에 패션 선진국에 대한 동경만 쌓여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과 사무실 앞에서 ‘구치 장학생’을 선발한다는 안내문을 보게 됐다.
구치 장학생으로 선발된 학생들은 다들 최 씨와 비슷한 사연을 지니고 있었다. 어려운 환경이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매 학기 성적 장학금을 휩쓰는 모범생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대학생들이 대부분 해외 연수를 다녀오는 요즘 이들 5명 가운데 4명은 이번에 난생처음으로 외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것도 그렇게 동경하던 ‘명품’의 본고장, 이탈리아를 찾은 것이다.
청일점인 소원영 씨는 지난 학기 모든 과목에서 ‘A+’ 학점을 받았다. 고3 때 진로를 결정해 미술 공부를 뒤늦게 시작했다. 형편이 넉넉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친구 부모님의 도움으로 미술학원을 소개받아 학원비를 할인받았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줄곧 이 미술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며 용돈을 벌었다.
장학생 선발을 위한 2차 미션은 3시간 안에 구치의 유명 핸드백 모델인 ‘뱀부백’을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소 씨는 죽부인을 디자인 모티브로 한 작품을 선보였고 구치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프리다 자니니는 “독창적인 아이디어”라고 칭찬했다.
경남 창원 출신인 송윤정 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교복업체가 중고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미래형교복공모전에서 대상을 탄 디자인 인재였다. 그때 받은 상금으로 미술학원에 다닐 수 있었다. 송 씨는 “원래부터 가장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구치의 프리다 자니니였는데 구치 본사를 직접 방문하니 꼭 그와 함께 일하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 후회 없는 삶을 위하여
송 씨는 디 마르코 사장에게서 장학증서를 받는 자리에서 감사 카드를 전달했다. 가격이 비싸 몇 번을 망설이다가 샀다는 예쁜 카드에 깨알 같은 글씨로 감사의 마음을 담았다.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손으로 꾹꾹 눌러 쓴 카드를 펴 본 디 마르코 사장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샴페인을 곁들인 다과회장에서 그는 자신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학업을 이어 왔다고 고백했다.
“만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부모님이 지원해 줄 형편이 못 됐습니다. 일본 문학으로 진로를 바꿨죠. 그러나 역시 이걸로는 돈을 벌기 쉽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어 경영으로 진로를 또 바꿨습니다.”
“우리 나이대인 20대 초반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학생들의 질문에 디 마르코 사장은 “그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꿈을 끝까지 좇을 용기가 없었다는 점이 가장 후회된다”고 말했다. 그는 “경영인은 이렇게 말로 표현하는 재주밖에 없지만 여러분은 디자인이라는 재능을 타고났으니 더 유리한 것 아니냐”며 “이런 재능을 갖게 해주고 꿈을 위해 나아가는 걸 막지 않으셨던 부모님께 감사하라”고 전했다.
그는 또 학생들에게 구치의 아동복 라인인 ‘구치 칠드런’에 한국인 디자이너가 근무하고 있다고 전하며 “글로벌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선 세계를 향해 눈을 열고, 한국적 유전자를 가슴 깊이 간직하라”고 조언했다.
귀국행 비행기에서 이들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장애정 씨는 “왠지 가슴이 벅차기도 하고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김지영 씨는 “패션 대기업에 취업해 아동복 디자인을 하며 안정된 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패션 선진국을 직접 보니 더 큰 꿈을 품게 됐다”며 “글로벌한 환경에서 세계의 디자인 인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밀라노=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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