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대기업 그만두고 외딴섬으로 간 남자…왜?

동아일보

입력 2013-02-21 03:00 수정 2013-02-21 08:20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日 소니 엘리트 직원에서 외딴섬 동사무소 계약직으로… 이와모토 씨의 어떤 ‘역발상’

도쿄 토박이인 이와모토 유 씨가 제2의 인생을 시작한 낙도 아마 정의 바닷가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주민들에게 낙도에서도 우수한 교육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아마 정=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도로 가는 길은 고달팠다.

14일 오후 6시 10분 도쿄(東京) 역에서 신칸센에 올라 오카야마(岡山) 역에서 일반열차로 갈아타고 돗토리(鳥取) 현 요나고(米子) 역에 도착하니 오후 11시 45분. 역 앞 호텔에서 잠을 잔 뒤 이튿날 아침 버스를 타고 시치루이(七類) 항구로 향했다. 오전 9시 출발 여객선을 타고 4시간 남짓 가서야 시마네(島根) 현 오키(隱岐) 군 아마(海士) 정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이동 시간만 10시간이 넘을 정도로 지독한 낙도(落島). 본토와 연결되는 여객선도 하루 2편밖에 없다.

1박 2일에 걸쳐 ‘멀고 먼’ 아마 정으로 향하는 동안 떠오른 생각은 단순했다. ‘굴지의 기업 소니에 다니던 그가 왜 도쿄를 떠나 낙도의 동사무소 계약직으로 갔을까. 그것도 젊은 나이에….’


문 닫을 뻔한 낙도 고교 부활 프로젝트

이와모토 유(巖本悠) 씨. 올해 34세로 도쿄 토박이인 그는 낙도를 ‘제2의 인생 출발점’으로 선택했다. 대학 시절 2년 동안 아시아 아프리카로 여행 갔을 때 크고 작은 도움을 준 현지인을 위해 뭔가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을 뿐이던 그였다. 교육학 전공자인 그에겐 ‘교육으로 세상을 더 풍요롭게 만들겠다’는 막연한 각오만 있었다.

2004년 도쿄가쿠게이(東京學藝)대 졸업과 동시에 소니에 입사한 그는 인사부에서 인재 육성 업무를 맡았다. 인생의 전환점은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2006년 5월. 아마 정에 살던 친구의 부탁으로 아마중에서 특별수업을 했다. 수업을 마친 뒤 마을 어르신, 동사무소 직원들과의 저녁식사 자리. 그들은 섬에 하나 있는 도젠(島前)고의 존폐를 걱정했다. 당시 신입생 수가 28명. 21명까지 떨어지면 학교 문을 닫아야 한단다. 그럼 아마 정 주민은 고교생 자녀를 육지로 유학 보내야 한다. 아무래도 자녀와 함께 이사할 주민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줄어드는 주민의 감소 속도가 훨씬 빨라질 판이었다.

섬의 어르신 중 일부가 이와모토 씨에게 “도와 달라”고 조심스럽게 요청했다. 보통사람 같았으면 적당히 인사치레로 대답하고 말았을 텐데…. 이와모토 씨는 달랐다. 그의 가슴이 뛰었다. 저출산, 고령화, 인구 감소 등 일본의 문제점이 응축된 낙도를 교육으로 되살리고 싶다는 의지와 사명감이 일었다.

넉 달 뒤 회사에 사표를 냈다. 소니 인사부 관계자는 “입사 면접에서 ‘세계에 공헌하고 싶다’고 말한 걸 기억한다”며 격려했다. 부모도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다. 여자친구도 거들었다. 하지만 여자친구의 부모는 난색을 표했다. 일류 대기업을 떠나 월급이 절반인 데다 3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동사무소 계약직으로 가겠다고 하니…. 딸 가진 부모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와모토 씨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2006년 12월. 그는 짐을 싸서 기자가 방문한 같은 코스로 아마 정을 향했다. ‘교육으로 반드시 섬을 부활시키겠다’고 다짐하며.


섬의 불편함 재구성한 역발상

어느 낙도나 안고 있는 문제점은 비슷하다. 아마 정 인구는 10년 전 2600명에서 현재 2300명으로 줄었다. 인구부터 늘리는 게 급선무였다. 외부에서 특히 출산이 가능한 20, 30대를 끌어오려면 일자리와 자녀교육을 위한 학교가 필수적이다. 이런 판단에서 이와모토 씨는 도젠고의 매력을 높이는 작업이 궁극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동사무소 계약직원이 된 그는 ‘고교 매력화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지역 과제를 해결하고 활성화할 인재를 육성하는 게 목표였다. 아울러 대도시 학생들도 유학을 오고 싶게끔 만들고자 했다.

‘도젠고의 매력이 뭘까?’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고 오히려 단점만 잔뜩 나왔다. 학생 수가 계속 줄고 1차산업 자원만 풍부하며 본토까지 드나들기 힘들고…. 이를 장점으로 만들어야만 본토 학생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판단했다.

역발상의 접근이 빛을 발한 게 이때였다.

학생 수가 적으면 ‘소규모 집중 교육’을 할 수 있다. 도젠고의 전체 학생은 130명이고 교사는 18명이었다. 교사 1명이 약 7명의 학생을 맡는 셈이다.

볼링장 당구장 오락실 등 도시엔 널려 있는 학생들의 놀이시설이 없다는 점도 장점으로 부각했다. 낚시, 수영, 나물 캐기, 눈싸움 등 창의력을 개발하는 놀이를 활성화했다. 24시간 편의점도 없고 대형 전자매장도 없다 보니 필요한 것을 미리 사는 계획성도 기를 수 있었다. 갖고 싶은 것을 포기할 때 인내력이 생긴다. 물류비로 인해 공산품이 비싼 대신 섬에서 나는 어류 채소는 저렴했다. 생존을 위해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법을 몸에 익혀야 한다.

이와모토 씨는 2010년부터 도쿄와 오사카(大阪)의 학원들을 찾아다니며 장점으로 승화시킨 아마 정 교육 프로그램 설명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했다. ‘섬 유학’을 홍보한 지 2년.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폐교를 걱정하던 도젠고는 지난해 1학년을 1학급에서 2학급으로 늘렸다. 지난해 신입생 수는 59명. 그중 21명이 본토에서 찾아온 유학생이다.

2010년 교토대 게이오대 와세다대 등 출신의 강사 6명을 모셔왔다. 한국의 학원에 해당하는 학습센터를 개설하기 위해서다. 동일한 수업을 받는 학교와 달리 학습센터에선 학생 수준에 맞는 개별 지도를 한다. 현재 학생 130명 가운데 50여 명이 학습센터에 다닌다.

학습센터에선 지역 주민도 참가하는 ‘꿈 세미나’도 열린다. 학생이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면 구체적인 실현방안을 찾아준다. 그러자 학생들도 달라졌다. 이젠 스스로 목표의식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과거엔 아마 정의 부자는 자녀를 모두 본토 고교로 보냈다. ‘본토 고교=우수한 고교’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이젠 아마 정에서도 우수한 교육을 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피어나고 있다. 지난해 졸업생 33명 중 아마 정 사상 최초로 명문 사학인 와세다대 입학생이 나왔다. 아마 정의 중학교를 졸업한 뒤 도젠고 입학 학생 비율도 과거 40∼50%에서 50∼60%로 뛰었다.


인간관계 배워가는 도시 유학생들

이런 게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2006년 아마 정으로 왔을 때 대부분의 주민은 그를 ‘이방인’으로 취급했다. 낯선 도쿄에서 온 젊은이가 섬을 교육으로 살리겠다고 했으니…. 적을 두고 있던 동사무소의 상당수 직원뿐 아니라 도젠고의 일부 교사도 의심의 눈초리를 건넸다. ‘이 도회지 녀석이 무슨 꿍꿍이로 여길 왔지?’ 마치 이런 눈길이었다.

고교 매력화 프로젝트의 성과도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학생들은 계속 섬을 떠났다. 첫 2, 3년 동안 이와모토 씨는 애가 탔다. ‘괜히 왔나’ 하는 후회도 됐다.

몇 년 후 도시 학생들이 섬으로 유학 오기 시작했지만 그때도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또 다시 발생했다. 아마 정 학생은 초등학교 입학부터 고교 졸업까지 항상 같은 반 친구들과 공부했다. 최근 도쿄와 오사카에서 유학생이 오면서 이른바 ‘도시 학생’과 함께 공부하자 문화적 충돌이 벌어졌다. 서로 따로 놀기 시작한 것.

2년 전 학예회를 준비하는 아이디어 회의 때의 일이다. 도시 학생들이 이런저런 의견을 내는 동안 아마 정 학생들은 잠자코 들었다. 아마 정 학생들은 회의가 끝난 뒤 “도시에서 온 애들은 자기 말만 하고 주변 배려를 안 한다. 이들의 아이디어는 지역 주민에게 폐를 끼친다”고 지적했다. 도시 출신 유학생들은 “아마 정 학생들은 회의 시간에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고 나중에 불만만 이야기한다”고 맞받아쳤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해결했다. 아마 정 주민들은 그의 열정을 믿기 시작했고, 학생들도 문화적 충돌을 자연스럽게 극복했다.

학생들의 융합 촉매제는 낚시였다. 낚시를 해본 경험이 없던 도시 학생들이 자연히 아마 정 학생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데면데면하게 지낼 수만은 없던 아마 정 학생들이 월척을 낚는 포인트를 알려주고 함께 낚시를 했다. 긴 시간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동서 가치’의 충돌은 사라졌다.

이들이 의기투합하면서 ‘관계 맺기’ 관광 프로그램이 탄생했다. 간사이(關西) 지역 출신 유학생에겐 대부분 알고 항상 인사하는 아마 정 주민들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너무나 신기했다. 이런 정(情)을 관광객에게도 느끼게 해주자는 아이디어가 이 프로그램 탄생으로 이어졌다. 예를 들면 관광객에게 ‘성이 오타(大田) 씨인 주민 3명을 찾아 그들의 집을 지도에 표시 하세요’ ‘굴 양식업을 하는 주민 5명을 찾아 사진을 찍어오세요’ 등의 숙제를 내는 것이다. 관광객은 아마 정 주민들과 이야기하며 도움을 받아야만 숙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아마 정 주민들이 얼마나 끈끈한 정을 갖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 ‘관계 맺기’ 관광 프로그램은 2009년 일본 전국 관광프로그램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30세에 돌아와 동장 하겠다는 학생들

이와모토 씨의 낙도행은 대도시 주민이 농어촌으로 이주한 사례다. 그가 아마 정을 찾은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218가구 330명이 이곳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전체 인구는 계속 줄고 있다. 여전히 섬에서 나가는 주민의 수가 많기 때문이다.

이와모토 씨의 새로운 과제는 장기적인 아마 정의 발전 방향을 만드는 것. 고교생이 아마 정에 머물 수 있도록 온갖 아이디어를 냈던 그는 뜻밖에도 학생들에게 고교 졸업 뒤 섬을 떠나라고 조언한다. 더 큰 세상을 보고 아마 정과 다른 문화를 경험해야 고향의 문제점과 개선점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

그들이 완전히 떠나버리면 어떻게 할까. 그는 “고교 시절은 장래의 삶과 진로를 본격적으로 고민하는 시기다. 이 시기에 아마 정의 가능성을 몸으로 느낀 학생일수록 고향에 대한 애착이 높아진다. 부메랑처럼 되돌아올 것으로 믿는다”고 강조했다.

이와모토 씨는 설문조사 결과 하나를 내밀었다. 고교 매력화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2010년 4월과 2011년 3월에 질문한 것. ‘장래 아마 정에 되돌아와 일을 하고 싶다’는 질문(5점 만점)에 대한 응답은 2.77점에서 3.22점으로 높아졌다. ‘고향에 공헌하고 싶다’는 응답도 3.19점에서 3.84점으로 뛰었다.

몇몇 졸업생이 섬을 떠나며 남긴 말도 소개했다. A 군은 지난해 도쿄의 대학에 진학하며 “30세에 돌아와 동장을 하겠다. 그래서 섬의 총행복지수를 높이겠다”고 말했다. B 군은 “꼭 되돌아와 지역을 활발히 움직이게 할 커뮤니티 카페를 만들겠다”고 했다. C 양은 “섬에 의료시설이 부족하니 간호사가 돼 섬 주민들을 돌보겠다”고 했단다. 이 가운데 얼마나 되돌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학생들의 이런 답변은 희망을 준다.

낙도 생활 7년째에 접어든 도쿄 토박이 자신에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만족합니다. 식사가 맛있습니다. 이곳에서 생산된 쌀과 야채, 생선은 안심하고 먹을 수 있습니다. 동사무소 4분 거리에 집이 있습니다. 매일 저녁을 집에서 먹고 두 살 된 아이를 목욕시킵니다. 요즘은 가족 모두가 전통 춤을 배우고 있습니다. 학교 과외활동으로도 도입했습니다. 아마 정에선 가정 직업 취미 생활이 모두 연결된 느낌입니다. 도쿄에서 과연 이런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아마(시마네 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