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발목 잡힌 세계 경제]<下> 끝나지 않은 폭탄 돌리기

동아일보

입력 2012-06-15 03:00 수정 2015-04-29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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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임기만 넘기면 된다”… 증세-복지삭감 등 골칫거리 미뤄

최근 일본 정국의 모든 초점은 정기국회가 끝나는 21일에 맞춰져 있다.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가 소비세 인상안 국회 통과에 실패하면 중의원 해산도 불사한다며 배수진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반신반의하던 일본 언론은 노다 총리가 소비세 인상안에 정치 생명까지 걸고 나서자 선배 정치인들의 ‘폭탄 돌리기’가 이번에는 과연 마침표를 찍을지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20년’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가 만성적인 재정적자지만 역대 정치인들은 모두 떠넘기기 일쑤였다.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소비세 인상 등 증세를 주장하면 비주류나 소외됐던 정치인들이 ‘증세 반대’라는 달콤한 말로 인기를 얻는 일이 되풀이됐다.

‘표 떨어지는 일은 다음 정권에 넘기고 본다’는 정치인들의 ‘님트(NIMT·Not In My Term)’ 현상은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부에서는 “선거 민주주의 최대의 위기”라는 지적도 나온다.

① 내 임기만 넘기면 된다

2001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당내 소수파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당시 의원이 소비세를 올리지 않겠다고 해 승리했다. 2009년에는 민주당이 소비세를 올리지 않겠다는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전 대표의 공약을 앞세워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요즘은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과 같은 아웃사이더가 소비세 인상에 반대하면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은 1994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 때 소비세를 3%에서 5%로 인상한 이후 18년째 ‘증세 숙제’가 미뤄져 왔다. 참다못한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지난해와 올해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잇따라 강등하며 ‘정치 리더십 부재’를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그리스 정부와 정치권은 ‘국민을 속여서라도 내 임기만 넘기면 된다’는 전형적인 ‘님트’ 사례다. 2004년 총선에서 정권을 잡은 그리스 우파 신민주당 정부는 이전 사회당 정부가 유로존에 가입하기 직전인 2000년부터 유럽통계청에 각종 경제 수치를 속여 보고한 사실을 밝혀냈다. 정권의 경제 실정을 감추기 위해 유로존 가입에 필요한 제출 서류까지 허위로 작성한 것이다.

하지만 신민주당도 큰 차이가 없었다. 2009년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6%로 전망된다고 EU에 보고했으나 그해 10월 총선에서 다시 집권한 사회당 정부는 재정 적자가 GDP 대비 12.7%에 달할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이처럼 거짓말로 위기를 무마하고 폭탄을 돌려 자국의 경제를 피폐시키고 유럽의 재정위기를 불러왔다.

② 민감한 경제위기 해결 방안엔 손놓고 엉뚱한 핑계만

미국은 재정적자 감축 방안을 놓고 벌이는 여야의 ‘눈치작전’에 경제가 곪고 있다. 서민지지 기반의 민주당이 부유층 증세를 통해 세수를 늘리자고 주장하면 공화당은 건강보험 등 사회복지 지출을 대폭 삭감하자며 맞선다. 대타협이 불가피하지만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이라 어느 쪽도 먼저 손을 내밀 기미가 없다. 워싱턴포스트는 “전형적인 정치인의 복지부동”이라며 “협상 과정에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지지층의 표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우려해 아무도 협상 테이블에 못 나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양당 정치인들이 대선 이후에도 미봉책만 쏟아내다 해를 넘길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실제 지난해 재정적자 감축을 위해 민주 공화당 의원으로 구성된 슈퍼위원회는 합의에 실패하고 시한을 올 연말로 연장한 바 있다.

제프리 색스 미 컬럼비아대 경제학과 교수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국제사회가 미 의회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리더십에 실망하고 있다”며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미국도 일본과 같은 ‘잃어버린 20년’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③ 글로벌 경제리더십 실종

미국이나 일본, 유럽 정치인들의 ‘님트’에 따른 영향은 타국에도 미친다는 데 세계 경제의 불행이 있다. 한 국가의 재정위기는 촘촘히 얽힌 금융신경망을 타고 순식간에 세계 경제위기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중상주의 시대에는 ‘내 나라만 괜찮으면 된다(Not In My Yard)’며 여차하면 문을 걸어 잠그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유럽 경제 회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독일이 과도한 재정 긴축 등을 이유로 적극적으로 타국의 구제에 나서지 않을 경우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유로화 단일 화폐 사용 이후 제조업 경쟁력이 강한 독일은 유로존에 대한 수출이 급등해 통일 이후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큰 원동력이 됐다. 유로화로 가장 큰 득을 본 독일이 유럽 경제의 기관차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국내 정치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구제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조화순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과)는 “정치인들이 집권이나 당선 등 단기적 이익을 포기할 인센티브가 없다는 것이 문제”라며 “그리스 같은 포퓰리즘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선출제라는 민주주의적 제도가 갖는 근본적인 결함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 교수는 “정치인들은 자신의 시대에 주어지는 부담을 공유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며 “정치인이 이를 감당하고 수행할 수 없다면 사회의 지식인 계층이 나서서 쓴소리와 조언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뉴욕=박현진 특파원 witness@donga.com  
정윤식 기자 jys@donga.com  
▼ 국가 위기 넘긴 지도자들 ▼


英 통합-결단 상징 대처
獨 경제체질 바꾼 슈뢰더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을 극복할 방법은 없을까.

전문가들은 국가 파산의 위기 앞에서 국민에게 ‘쓴 약’을 처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정치 지도자들의 리더십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이 그런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사회의 지식인 계층이 나서서 쓴소리와 조언을 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문이다. 활발한 토론이 지식인 계층에서 이뤄진다면 국민 또한 포퓰리즘 정책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위기 극복 리더십의 원조는 ‘통합과 결단’을 보여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 그는 국민에게 통합과 희생을 요구하는 명확한 메시지를 던지며 전례 없는 재정 긴축과 공기업 민영화 등 개혁 정책을 흔들림 없이 추진했다.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는 동서독 통일의 후유증으로 ‘유럽의 병자’ 취급을 받던 2000년대 초 독일 경제를 살리기 위해 사회민주당의 전통적 노선을 접고 대대적인 시장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2003년에는 “누구도 일하지 않고 쉬게 해선 안 된다”는 정신을 뼈대로 한 경제개혁 청사진 ‘어젠다 2010’을 내놓았다.

금속노조연맹 위원장 출신인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은 취임 후 연금지급 시작 연령을 7년 올리는 등 국민의 허리띠는 졸라매고 기업의 세금은 대폭 깎아 경제 활력을 되찾는 데 집중했다. 변절자라고 비난하는 지지 세력에게는 “처자가 있는 가장이 총각 때처럼 처신할 수 있는가”라고 맞받아쳤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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