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굉음과환호…모터스포츠는‘일본車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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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05-15 02:56 수정 2009-07-3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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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그랜드 투어링카 챔피언십 르포 이달 4일 일본 후지산 기슭이 요동쳤다. 봄볕은 강렬했다.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산자락을 뒤흔들었다. “부앙 부앙 부아앙∼.” 슈퍼카의 엔진 소리. ‘쿵쾅 쿵쾅 쿵쾅’ 심장 박동도 빨라졌다. 도쿄에서 서남쪽으로 2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시즈오카(靜岡) 현 고텐바(御殿場) 시. 후지산 기슭 구릉지대에 자리 잡은 일본 최대 규모의 서킷(경주로) ‘후지 스피드웨이’가 들썩였다. 이날 이곳에서 세계 3대 투어링 자동차 경주대회인 전일본 그랜드 투어링카 챔피언십(All-Japan Grand Touring Car Championship), ‘슈퍼 GT’의 3번째 결선 경기가 열렸다. ○ 규모와 열기 모두 압도적 후지산 정상을 배경으로 한 후지 스피드웨이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직선 거리만 1.5km가 넘는 전체 4.5km의 서킷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트랙과 각종 시설물이 225만 m²(약 68만 평) 대지 위에 펼쳐져 있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서킷다운 규모였다. 국내 서킷은 2.5km에 불과하다. 경기장 입구로 들어서기 위해 산자락을 올라가면서부터 자동차 배기음이 귀청을 때렸다. 엔진 소리가 산자락을 타고 하늘을 울리는 듯했다. 자동차 마니아들의 심장을 뛰게 한다는 그 소리였다. 팬들의 열기도 뜨거웠다. 레이싱에 열광하는 관중의 함성은 엔진소리를 삼킬 듯했다. 이날 모인 인파만 5만여 명. 10여 개의 대형 주차장이 부족한 듯 빼곡히 들어찼고, 경기장 곳곳마다 관중의 행렬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일부 열혈 팬들은 결승에 앞서 전날 열린 예선전까지 챙겨보느라 노숙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이 쳐놓은 텐트로 주차장은 캠핑장을 방불케 했다. 일본 케이블 방송인 J스포츠의 다케시 구보(久保健) 프로듀서는 “이게 바로 일본 자동차 산업을 받치는 힘”이라고 했다. 일본 모터스포츠는 자동차 선진국 일본의 단면이라는 얘기다. 그는 “일본 역시 자동차 마니아들이 모터스포츠에 열광하지만 마니아의 규모가 크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자동차를 접해 관심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날 경기장을 찾은 관람객도 아이들과 함께한 가족 단위가 대부분이었다. 초등학생 자녀 둘을 데리고 경기장을 찾은 사카유키 아이카와 씨(47)는 “중학생까지는 입장료가 무료라서 부담 없이 가족나들이를 할 수 있다”며 “워낙 차를 좋아해 1년에 3번 이상은 카레이싱을 직접 보러 다니는데 아이들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 어릴 때부터 모터스포츠 즐겨 오전 10시 45분. 굳게 닫혀 있던 경주로의 문이 열렸다. 이른 아침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온 팬들의 기나긴 행렬에 활기가 돌았다. 경주차 정비 공간인 피트가 관람객에게 개방되는 ‘피트 워크(Pit Walk)’ 시간이다. 관람객들은 말 그대로 피트를 걸어 다니며 경기에 출전하는 각 팀의 선수와 레이싱걸을 만날 수 있다. 정비기술자들이 경주차를 손보는 장면도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서 볼 수 있다. 팬들에게는 경기만큼이나 흥미로운 시간이다. 각 팀의 피트에는 선수들의 사인을 받고 사진을 함께 찍으려는 팬들이 구름 떼처럼 몰렸다. 특히나 모터스포츠의 조연인 레이싱걸에게 카메라 세례가 쏟아졌다. 일본에서는 레이싱걸이 대중의 ‘섹스 심벌’로 자리 잡고 있다. 톱 모델의 반열에 오른 요시오카 미호, 록밴드 ‘자드’의 보컬인 사카이 이즈미 등 많은 인기 연예인들이 레이싱걸 출신일 정도. 이들은 1시간 이상 관객들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포즈를 취하면서도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고, 관객들 역시 안전거리를 확보하며 질서정연하게 사직을 찍었다. 텐트 치고… 아이 손잡고… ‘질주’와 열애중인 열도 세계 최고 수준 경기장에 5만명 운집 어릴때부터 자연스럽게 ‘車사랑’ 키워 점심시간에는 서킷 뒤편에 마련된 이벤트 공간이 장사진을 이뤘다. 레이싱과 관련된 의류와 기념품을 파는 매장이 메이커별로 들어서 있고, 충돌 시험 등 각종 체험 공간이 마련돼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다. 어린이를 위한 이벤트도 풍성했다. ○ 벽 높은 세계 수준의 대회 오후 1시경, 경기를 1시간여 앞두고 차량을 최종 점검하는 피트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양산차의 레이싱 경기인 슈퍼 GT는 500마력의 GT500과 300마력의 GT300 등 2종목이 혼주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대회 관계자는 “500마력의 차와 300마력의 차가 동시에 경주를 하게 되면 따로따로 경주를 할 때보다 예상외 변수들이 발생하게 된다”며 “경기의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혼주 경기를 치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회에는 GT500 15개 팀, GT300 21개 팀이 출전했다. 금호타이어의 후원으로 한국인 드라이버 김한봉 선수(44)도 GT300에 참가했다. 올해로 6년째 이 대회에 참가하는 금호타이어는 이번에는 한국 드라이버의 풀시즌 출전을 목표로 출사표를 냈다. 금호타이어 측은 “슈퍼GT 경기가 모두 9차례 열리는데, 한국인 드라이버가 9번 경기를 모두 뛴 전례가 없다”며 “모터스포츠의 선진국인 일본의 벽은 그만큼 높다”고 전했다. 총 1만5000km 대륙 횡단으로 ‘지옥의 랠리’로 불리는 다카르랠리를 완주한 유일한 한국인 드라이버인 김 선수도 이 대회에서만큼은 “신경이 곤두선다”고 했다. 10년 넘게 국내외에서 200회 이상의 레이싱을 펼친 김 선수는 “후지 스피드웨이 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르게 되면 한국과 일본 모터스포츠의 수준 차를 바로 실감하게 된다”며 “다른 대회에서는 긴장이란 걸 모르는데 슈퍼GT는 유독 손에 땀이 날 정도”라고 말했다. ○ 시속 250km 이상으로 달리는 머신 경기 시작 30분 전, 출전 차량 36대가 경기장에 들어섰다. GT500에는 닛산 ‘GT-R’, 렉서스 ‘SC430’, 혼다 ‘NSX’ 등이 출전했고, GT300에는 페라리 ‘F430’, 포르셰 ‘911GT3’ ‘박스터’, 렉서스 ‘IS350’, BMW ‘Z4 M쿠페’ 등이 등장했다. 조성태 금호타이어 수석연구원은 “겉모습은 양산차와 닮은꼴이지만 내부는 경기용으로 완전히 개조돼 있다”며 “극한의 상황을 견딜 수 있도록 모든 기술이 집약된 레이싱카는 자동차가 아니라 ‘머신’”이라고 말했다. 머신들이 예선전의 기록에 따라 출발선을 기준으로 나란히 정렬하자 정비사들이 달라붙어 차량을 최종 점검했다. 뒤이어 각 팀에 소속된 레이싱걸들이 출전 차량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아크텍모터스포츠팀의 포르셰 박스터로 출전하는 김 선수도 자세를 가다듬었다. 관중석에서는 각 팀을 응원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잠시 뒤 경기장에 차량들만 남자 주위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오후 2시 정각, 출발신호가 울리자 머신들은 굉음을 내며 바람을 갈랐다. 직선코스에서는 시속 250km, 곡선에서도 시속 180km 이상의 고속으로 무한질주가 이어졌다. 승리는 400km의 코스를 먼저 도는 팀에 돌아간다. 400km를 완주하려면 4563m의 서킷을 88바퀴(랩) 돌아야 한다. 2시간 반 정도의 경기 시간 동안 2명의 레이서가 번갈아 차를 몰게 된다. 정확히 2시간 26분 9초 만에 GT500 출전팀인 니스모의 닛산 ‘GT-R’이 88랩을 돌고 결승점을 통과했다. 동시에 경기도 종료됐다. 우리나라 선수가 출전한 팀은 GT300 21개 팀 중 14위를 기록했다. 완주만으로도 의미 있는 경기였다. ○ 스포츠를 넘어선 기술력의 경연장 카레이싱의 시상식도 흥미로운 볼거리다. 시상대 위에 선 선수들은 반드시 모자를 쓴다. 모자에는 타이어 업체의 상표가 붙어 있다. 금호타이어 관계자는“모터스포츠에서 3대 요소는 머신과 드라이버, 그리고 타이어가 꼽힌다. 그런데 경주차와 드라이버는 한눈에 드러나지만 타이어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모자에 상표를 붙어 우승을 이끈 타이어를 알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중요한 관전 포인트는 모터스포츠의 비즈니스다. 카레이싱은 치밀한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모터스포츠에서 드라이버의 불굴의 정신은 통하지 않는다. 자본을 기반으로 한 기술이 뒷받침돼야 우승도 가능하다. 카레이싱팀은 거의 100% 기업의 투자로 운영된다. 완성차 메이커, 타이어 메이커 등이 돈줄이다. 서킷 곳곳이 상표로 도배되고 차체와 드라이버의 착용품에 상표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동차업계가 모터스포츠에 투자하는 것은 단순히 홍보 효과만을 노린 것은 아니다. 김성 금호타이어 일본법인장은 “도요타자동차의 경우 1년에 19번 열리는 F1 경기를 위해 우리 돈으로 3000억 원이 넘는 거액을 쏟아 붓는다. 단순히 브랜드 홍보 때문이 아니라 기술 개발을 위한 투자”라고 말했다. 카레이싱은 단지 경주가 아닌 자동차 성능의 극한을 시험하는 무대다. 김 본부장은 “레이싱 경기에서의 우승은 바로 기술력의 우승이다. 세계적인 완성차와 타이어 업체들은 모터스포츠를 통해 기술력을 인정받는다”고 강조했다. 모터스포츠는 사람의 경기 이상의 스포츠인 셈이다. 글·사진=고텐바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 디자인=공성태 기자 coonu@dog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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