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이야기가 있는 마을] “용과 까치가 다시 비상하길” 왜란의 상처가 남긴 恨

이해리 기자

입력 2017-12-07 05:45 수정 2017-12-07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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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매산은 어머니의 품처럼 넓다. 예부터 왜군의 잦은 침략에도 마을 사람들을 지켜준 든든한 산이다. 고흥|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14> 매곡마을 ‘용치강’ 설화

망매산 충신 혈맥에 말뚝을 박은 왜군들
하늘로 치솟던 용과 까치가 강으로 추락
지금은 논밭이 됐지만 사람들 믿음 여전

오랜 세월 척박했던 땅. 그만큼 사람들의 세상살이에 대한 의지는 강했다. 강하고 질긴 태도와 능력으로써만 세상은 살아지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이야기는 쌓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산한 삶을 이어가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밝고 슬프고 아름답고 비극적이어서 더욱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 설화는 그렇게 오래도록 쌓여 전해져오고 있다. 전남 고흥군을 다시 찾는 이유다. 지난해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고흥의 이곳저곳 땅을 밟으며 다양한 이들을 만난 스포츠동아는 올해에도 그곳으로 간다. 사람들이 전하는 오랜 삶의 또렷한 흔적을 확인해가며 그 깊은 울림을 함께 나누려 한다. 매달 두 차례 독자 여러분을 찾아간다.

전쟁은 사람들의 삶과 그 터전을 황폐하게 만든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왜구와의 전쟁은 특히 많은 상처를 남겼다. 왜군은 한반도 남단의 바다를 통해 조선으로 들어섰다. 전라남도 고흥 일대도 그 피해에서 온전하지 못했다.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러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그 이야기는 또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고흥군 풍양면 매곡리의 용치강 설화도 마찬가지다. 400년이 더 지난 이야기이고 지금은 마을의 지형 역시 예전과 많이 달라졌지만 사람들은 용치강에 얽힌 설화만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 왜군이 찾으려한 ‘충신’의 혈맥

매곡마을 앞에는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다. 뒤로는 망매산이 버티고 서 있다. 마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망매산을 자주 오르내렸다. 여기서 태어난 최일환(80) 할아버지도 그렇다.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둥그렇게 파인 곳이 있어. 옛날엔 왜놈들이 와서 말뚝 박은 곳이라고 여겼지. 어릴 때도 그렇게 믿었다니까. 그 터가 봉화를 피운 곳이라는 말도 있고. 아무튼 예사 터는 아니지.”

최일환 할아버지의 기억대로 매곡마을은 임진왜란과 뗄 수 없는 곳이다. 망매산에 얽힌 이야기가 시작된 때도 그 무렵이다.

예부터 조선 해안으로 몰래 숨어들어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로 인해 사람들의 피해는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나라에서는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관군을 보내기도 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이미 마을들은 쑥대밭이 되고 난 뒤였다.

망매산은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줬고 그래서 사람들은 ‘어머니 산’이라고 불렀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이 산은 나라를 지킬 충신이 태어날 기운을 잉태한 곳. 마을 사람들은 어지러운 세상을 바라보면서 ‘나라를 바로잡아줄 충신이 나타나게 해 달라’고 망매산을 향해 기원하곤 했다.

망매산. 고흥|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임진년 어느 날 왜군이 조선을 덮쳤다. 남해를 거쳐 한양으로 진격하던 왜군 무리는 풍양면 매곡마을에 당도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왜군은 발길을 멈추고 마을 위쪽에 자리 잡은 망매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산이 가진 특별한 기운이 왜군에게도 금방 전해졌기 때문이다.

풍수지리에 밝은 왜군 장수는 망매산을 예사롭지 않은 눈으로 살폈다. 왜군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마을 사람들은 삽시간에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어찌할 방법도 없었다. 왜군 장수는 마을의 한 노인을 붙잡고 물었다.

“아무리 봐도 산의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저 산은 특별한 곳이냐.”

“네. 맞습니다. 예부터 충신이 태어난다고 하는 혈맥이 흐르는 산입니다.”

장수의 눈빛이 반짝였다. 군사를 이끌고 곧장 산으로 올라간 장수는 충신이 나온다는 터를 찾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마을 사람들의 걱정은 커졌다. 왜군이 충신 혈맥을 찾는다면 고흥 지역은 물론 나라도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걱정이었다. 왜군이 혈맥을 찾지 못하기를 하늘에 빌고 또 빌었지만, 마을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어느 날 산 정상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놀란 사람들의 눈이 산으로 향했을 때 연기에서 무언가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용이었다. 그 용의 머리엔 까치 한 마리가 앉은 채였다.

기어코 충신 혈맥을 찾아낸 왜군은 그곳에 말뚝을 박아버렸고, 그 충격으로 산 깊은 곳에서 잠자던 용과 까치가 하늘로 치솟은 것이다. 용과 까치는 다시 땅으로 낙하해 마을 앞을 흐르는 강물로 곤두박질친 뒤 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름 없던 강은 그때부터 용치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 여전히 용과 까치를 기다리는 사람들

왜군이 망매산 정상에 박았다는 말뚝의 진위는 확실치 않다. 마을에서 80년 동안 살아온 최일환 할아버지처럼 “왜놈들 말뚝”이라고 여기는 이가 있지만, 임진왜란이 남긴 피해와 상처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의 한이 그런 믿음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한수일 씨는 “망매산 정상은 오래전엔 봉화 터가 있었다”며 “어떤 흔적이 남았다면 그건 아마도 봉화 터일 것이다”고 했다. “자세하게 알지 못해도 왜군이 이 마을을 주목했다면 지형적으로 중요했기 때문 아니겠느냐”며 “마을 뒤 높은 산과 마을 앞에 있던 강을 생각하면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긴 이유도 이해할만 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사람들은 예전엔 망매산 정상에 올라 불도 피웠지만 지금은 발길이 줄어들었다. 풀숲이 우거지면서 정상은 더는 쉽게 갈 수 없는 곳이 됐다. 용과 까치가 몸을 숨겼다는 용치강도 지금은 논과 밭이 됐다.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위해 강을 메우고 논농사를 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자취를 감췄지만 여전히 망매산과 용치강에 얽힌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다. 사람들은 용과 까치가 언젠가 다시 나타나 비상할 거라고 믿고 있다.

■ 설화

사람들 사이에 오랜 시간 구전(口傳)돼 내려오는 이야기. 신화와 전설, 민담을 포괄한다. 일정한 서사의 구조를 갖춰 민간의 생활사와 풍습, 권선징악의 가치 등을 담은 이야기다.

고흥|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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