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의 프로방스를 걷다]집, 내 몸처럼 사랑하기… 함께 늙어가기

이승우 소설가·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

입력 2018-02-13 03:00 수정 2018-02-13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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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크리스티앙은 내가 1년 동안 살기로 한 엑상프로방스의 집주인이다. 올해 67세인 그는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70세 된 그의 누나는 아직 1층에 살고 있다. 길쭉한 직사각형의 나무 덧문이 창문마다 달린 전형적인 프로방스풍의 이 집은 1910년에 지어졌다. 108년 된 집은 긴 세월의 흔적을 건물 곳곳에 간직하고 있지만 내부는 뜻밖에 깔끔하고 튼튼하다. 방음이 잘 되지 않는다는 걸 빼면 별로 불편하지 않다.

리옹에서 15년째 살고 있는 한 한국인 지인은 내가 살고 있는 집의 나이를 전해 듣고는 가소롭다는 듯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1782년에 지어졌다고 말했다. 자기 주위에는 18세기에 지어진 건물에 사는 사람이 많다는 말도 했다.

어떻게 지은 지 200∼300년 된 집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지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집주인 크리스티앙이 직접 답을 알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 방의 벽에는 구멍을 때우고 페인트칠한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문고리를 고치고 계단을 손본 흔적도 뚜렷하다. 그는 거의 매일 연장을 들고 나타나 혼자서 뚝딱거리다가 돌아간다.

누더기처럼 덧대여 기워진 지붕들, 페인트칠이 된 낡은 덧문들, 집을 고치며 휴일을 보내는 남자들, 외출할 때면 덧문을 닫고 두세 개의 열쇠를 돌려 잠그는 수고를 귀찮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익숙한 풍경이다.

재건축을 위한 이주 공고가 났기 때문에 10년 넘게 살아온 집을 떠나야 했던 몇 달 전의 내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 집은 지은 지 40년쯤 된 아파트였다. 40년 나이의 서울 아파트는 곳곳에 녹이 슬고 금이 가고 낙서투성이고 칠이 벗겨져 더럽고 난방기를 계속 돌려도 추웠다. 그 집이 그 모양인 것은 지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라(고작 40년이다) 고치며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치지 않은 것은 고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곧 부수고 새로 지을 집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재건축추진위원회인지 하는 것이 결성되고 나면 재건축 인가를 받기 위해 일부러 건물을 더 낡아 보이도록 방치한다고 한다. 수리를 하거나 페인트칠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하지 않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대한민국에서 집은 주거의 공간이 아니라 부를 축적하는 수단이 되어 버렸다. ‘사는’ 곳이 아니라 ‘사고파는’, 사고팔기를 잘해서 이익을 남겨야 하는 투기 상품이 되어 버렸다. 부수고 다시 짓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느 아파트단지나 지은 지 30년만 되면 재건축을 하겠다고 나선다. 고치지 않은 낡은 집이, 곧 부서질 집이 더 이익을 볼 거라는 기대로 비싸게 거래되는 현상은 이상하다. 이 이상한 현상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우리가 집을 소유와 축재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관습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집이 투기와 치부의 수단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집은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 태아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안전하다. 자궁이 없다면 아이는 보호받지 못할 것이다. 아이의 집인 자궁은 아이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아이의 일부이지 아이의 바깥에 있는 무엇이 아니다. 아이의 신체 기관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도 있다. 자궁을 아이와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자궁의 변형이라는 점에서 집은 존재의 일부가 아니라 근거가 된다. 자연, 즉 외부 세계의 완전함에 맞설 수 있도록 불완전한 인간에게 주어진 특별한 기관과도 같은 것, 그러니까 신체의 일부나 마찬가지인 것이 집이다.

집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투기의 수단으로 여겨 사고팔고 더 큰 이익을 위해 서슴없이 부수고 새로 짓고 할 수가 없다. 토지와 집에 대한 관념의 혁신이 없이는 천박한 자본주의에 의해 주입되고 부풀려진, 소유물과 축재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집’의 명예를 회복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토지공개념 같은 것으로 대체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크리스티앙은 오늘도 들러서 뒷마당에 빨랫줄을 만들어 주고 갔다. 날이 더 풀리면 담벼락을 개조해 테라스처럼 만들 거라는 말도 했다. 봄이 되면 거기서 차를 마실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은 고마웠지만 나를 감동시킨 것은 그의 호의가 아니었다. 이것은 그가 친절한 사람이라는 말로 단순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집에 대해 정성을 들이는 것을 보면 상처 난 자리에 약을 바르고 신체의 일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수술을 하며 사는 인간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집이 몸의 일부인 것이다. 사고팔고 부수고 새로 지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고치고 손보고 어루만지며 집과 같이 늙어가(야 하)는 것이 사람이다.

나에게 집을 빌려준 프로방스의 한 평범한 사람으로부터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네 집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승우 소설가·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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