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선의 연극인 열전] 연출가 김광보 “김도진이 되고 싶다”

심규선대기자

입력 2017-04-29 22:46 수정 2017-04-29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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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책하고 있었다.

가장 최근에 연출한 ‘왕위주장자들’은 분명히 실패했고, 실패의 원인은 자기 때문이라고 못 박았다.

“평가가 극과 극이다. 반응에 충격을 받고 있다. 구체적으로 뭐가 나쁘다는 지적은 없지만 SNS에는 ‘불호’가 많다. 나는 리허설 때부터 이미 문제가 있음을 캐치했다. 2014년 ‘줄리어스 시저’ 이후 내 연극이 그 연장선에 있다고 하는 얘기가 많다. ‘줄리어스 시저’를 우려먹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안 바꿨나) 바꿀 여유가 없었다. 구조적으로 부술 수가 없었다. (시간은 있었는데) 좋게 말하면 익숙해졌고, 나쁘게 말하면 매너리즘에 빠졌다.”

나는 “관객의 수준이 거기까지 올라와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배우 말고는 뭘 보여주는 게 없다’고 하는데, 배우를 중심에 두는 게 내 스타일이어서 그런 말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내 스스로 ‘줄리어스 시저’를 우려먹었고,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게 문제다.”

헨리크 입센의 ‘왕위주장자들’은 그가 연출한 94번째 작품(재공연 포함)이다. 그렇게 많은 작품을 연출하다 보면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왕위주장자들’의 실패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 작품의 본질은 ‘심리적 갈등’인데 형태와 양식에만 치중했다는 것이다. 스스로 엄격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 있는 ‘그’는 연출가 김광보(53)다. 4월 19일 동아일보에서 그를 만났다.

그와의 인터뷰를 그가 연출했던 작품 중 5개를 골라 그 제목에 맞춰 정리하고자 한다(물론 작품의 제목만 따온 것이지, 내용과는 관계가 없다)


1. 은밀한 기쁨

그는 매우 성공한 연출가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은 연출가라거나 ‘믿보연(믿고 보는 연출)’이라는 별명은 ‘성공’의 다른 표현이다. 성공한 연출가이기 때문에 실패를 아파 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를 설명하는 말 중에 가장 자주 쓰이는 게 ‘미니멀리즘’과 ‘배우 중심’이라는 것이다. 두 단어는 같은 말이다. 가능하면 무대 위에서 불필요한 것을 없애는 것이 ‘미니멀리즘’이고 그렇게 해서 생긴 공간을 배우와 연기로 채우겠다는 것이 ‘배우 중심’이다.

“‘배우를 어떻게 중심에 놓을 것인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예요. 예전에는 배우에게 광분하는 것이 그 방법이라고 오도한 적이 있어요.…일련의 경험을 거치면서 이런 생각에 다다랐어요. 장식이라는 것이 왜 필요할까? 배우가 주체인데, 이 주체를 빼고 어떤 장식이 있어야 하나? 그러면서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걷어내기 시작했어요. 미니멀리즘의 대가인 로버트 모르스가 ‘형태의 단순함이 경험의 단순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거든요. 이게 정답이더라고요.”(더 뮤지컬, 2015년 7월호)

그런데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나는 배우들이 해야 할 카테고리를 정해준다. 추상적이긴 하다. 그렇지만 분석의 카테고리 벗어나면 강력하게 개입한다.”

그 전에는 이런 말도 했다.

“제가 연출하면 보통 하나부터 열까지 다 계산하는 타입인데다 대본 분석에 근거하지 않은 건 못하게 하기 때문에 쉽게 작업하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한극연극, 2013년 2월호)

그래서 나는 ‘배우 중심’을 달리 해석한다. 연출이 그토록 강력하게 배우 위에 선다면 사실은 ‘연출 중심’, ‘김광보 중심’이 아니냐고 물었다(질문이지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는 직답을 피하면서 연출의 힘에 대해 언급했다.

“연출의 힘은 매우 세다. 권한도 크다. 그러니 여러 가지 생각 끝에 결정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물론 결과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

즉 배우를 어떻게 쓸지는 전적으로 연출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연출의 성향에 따라 같이 작업하는 배우들이 있어요. 내가 연출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봐요. 그래서 배우는 좋은 연출을 만나야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어요. 우리 이런 이야기도 하지 않나요. ‘저 좋은 배우를 모아 놓고 공연이 왜 그래?’ 결국 100퍼센트 연출 탓인거죠.”(엔터미디어 2014년 4월)

연출가로서의 그의 치밀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기존에 대학로에서 활동하면서 작업했던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해봤을 때 저 자신 스스로가 굉장히 실험적이라든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작품을 하는 선도적인 연출자는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작품 하나 붙들고 어떤 장인정신으로 만들어왔던 사람이기 때문에, 한 작품 한 작품의 완성도에 주력을 해왔던 연출자였다는 거죠.”(한국연극, 2015년 9월호)

그런 제작 태도 때문인지, 그는 예술성과 대중성의 구분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관객들이 와서 객석을 메워준다는 해서 그 연극이 대중성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어떤 관객이 오느냐가 중요하다. 찾아오는 관객에 따라 평가도 달라진다. 그래서 예술성과 대중성을 구분하지 않는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함께, 그리고 그 둘을 오랜 동안 갖춘 것이 고전이다.”

그도 자신이 연출한 작품들에 대해서는 애정이 강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인류 최초의 키스’, ‘그게 아닌데’, ‘줄리어스 시저’를 전환점을 가져온 작품으로 꼽았다. ‘인류 최초의 키스’(2001년·연극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3’)는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고연옥 작가와의 협업을 시작한 작품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 후 둘은 ‘콤비’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많은 작품을 같이 했다. 김광보는 “고연옥 작가와는 궁합이 잘 맞는다. 그는 시의적이면서, 동시에 문학성도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그게 아닌데’(이미경 작·2012년)는 소극장에서 공연한 1시간 5분짜리 연극이 연극상 10개를 독식하는 기록을 세워 화제가 됐다. ‘줄리어스 시저’(2014년)는 ‘왕위주장자들’처럼 평가가 크게 엇갈렸는데 연극계 최고 권위인 동아연극상 작품상과 연출상을 받아 부담을 덜었다고 했다.

그는 2009년 12월부터 2년간 부산시립극단의 수석연출(예술감독)을 지냈고, 2015년 6월부터는 임기 3년의 서울시극단 단장으로 있다. 공직경험을 통해 모난 성격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연출가로서, 속칭 카리스마를 발휘해, 김광보 스타일의 연극을 만드는 게 여전히 그의 ‘은밀한 기쁨’이라고 믿는다.


2. 중독

그는 일중독자다.

“성공은 바람과 같은 것이다. 언제 날아갈지 모른다. 바람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고민하는 인간이다.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하는데 술도 못한다. 그래서 일로 푼다. 일을 안 하면 불안하다.”

그래서 다작이다. 1년에 8편을 연출한 적도 있다.

“주변에는 다작을 말리는 사람도 있다.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이 나온다고 하면서. 서울시극단 단장이 되고부터는 외부 작품을 안 하고 있지만, 단장에서 물러나면 다시 다작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떤 얘기를 하느냐가 중요하다. 공감하면 어떤 작품이라도 할 수 있다. 거절한 경우도 있다. 이 얘기를 왜 하지, 하는 느낌이 드는 작품, 현실과 동떨어지거나 유치한 작품은 거절한다.”

대본 분석도 거의 중독수준이다. 아주 꼼꼼하게 분석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것이 ‘미니멀리즘’과 ‘배우 중심’ 연출의 출발선이기도 하다.

생활에서도 중독 증상이 보인다.

그는 1998년부터 2013년까지 15년 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만 쓰고 입고 신었다. 속칭 ‘올 블랙’이다.

“1998년 송추의 ‘미추산방’에서 ‘뙤약볕’을 작업할 때였다. 뭘 좀 볼 줄 안다는 극단의 한 배우가 ‘당신한테는 검정색이나 흰색이 좋다’는 말을 해서 그때부터 검정색만 입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13년 어떤 문제로 심적 갈등을 겪으면서 검정색을 내려놨다. 검은 옷을 벗으니 주변에서는 화사해지고, 보기도 좋다고 말한다.”

13년 전부터는 지금 쓰고 있는 형태의 안경만 고집한다.

또 있다. 그는 영화광이다. 매일 밤 영화를 본다.

“스토리와 미장셴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연극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을 특히 좋아한다. 그의 ‘나생문’이나 ‘7인의 사무라이’를 ‘정중동(靜中動)’의 영화라고 하는 데, 그런 특성이 내 연극에도 들어있다.”

그래서 “앞서 당신이 말한 ‘실험적, 획기적 연극은 아니지만 장인정신으로 연극을 만든다’는 것이 ‘정중동’과 일맥상통하느냐”고 물었다.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연극 말고는 집착하는 것이 거의 없는데, 옷이나 안경, 영화 등에 대한 관심은 연극 이외의 집착으로 이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3. 뙤약볕

그는 뙤약볕을 쬐며 바닥부터 박박 기어서 오늘의 자리에 올랐다. 신파조로 말하면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얘기’이고, 식상한 표현으로는 ‘인간 승리’다.

그는 고졸이(었)다. 1983년 부산 금정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극단 ‘현장’의 문을 두드렸다.

“지금도 내가 그때 왜 극단에 들어가려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어쨌든 그래서 지금 이렇게 됐다. 극단 현장에서 청소도 하고, 배우도 하고, 워크숍도 했다. 그때 만났던 사람들이 지금 내 연극의 자양분이다. 매일 스터디를 하고 매일 발표했다. 그런 생활도 6개월 만에 끝이 났다. 스터디그룹 멤버들이 극단 운영의 투명성을 문제 삼았다가 모두 쫓겨났다.”

소년 김광보는 극단 ‘부두’(지금은 부두연극단)로 옮겨 갔고, ‘부두’는 ‘연희단거리패’와 함께 광복동에 있는 ‘가마골 소극장’을 근거지로 공연을 많이 했다. 그는 극장장 겸 무대감독으로 일했다(나는 그 후의 경력에 조금 놀랐다). 부산문화회관에서 3년을 조명기사로 일하다, 1990년 처음 서울로 올라와 바탕골 소극장에서 역시 조명기사로 취직했다. 그리고 1994년 극단 청우를 창단한다.

극단은 무리였을까. 3년만인 1997년 파산을 맞는다. 그는 처와 딸을 처갓집으로 보내고 대학로 고시원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자, 극단 미추의 손진책 연출을 찾아가 “연극을 계속하게 해 달라”고 호소했다.

왜 손진책 연출이었나.

“1994년 장우재 작가의 ‘지상으로부터 20미터’를 갖고 연출가로 데뷔했는데, 그 이후에도 손 선생님이 계속해서 내 작품을 보러 왔다. 그래서 손 선생님에게 의지했던 것이고, 손 선생님은 나에게 ‘뙤약볕’을 맡겼다. 1998년의 일이다. 뙤약볕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대본(박상륭 작)이기도 하고, 연출가로서 처음으로 인정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이 작품으로 한국연극협회와 한국일보사 백상예술대상의 신인연출상을 수상하고, 희곡은 그해 한국대표희곡으로 선정된다. ‘뙤약볕’은 2004년에는 극단 청우의 창단 10년 기념공연으로 다시 무대에 올랐다. 그가 앞으로 재공연하고 싶은 작품의 목록에도 올라있다(바닥을 기던 인생에 사정없이 내리 쬐던 뙤약볕을 조금이나마 피하도록 해준 ‘뙤약볕’이어서 그런 것일까)

그는 고졸 학력에 콤플렉스는 없느냐고 묻자, “의식하지 않는다. 학력위조파문이 났을 때는 어느 신문이 ‘고졸 거인’으로 소개한 적도 있다”고 넘어갔다(그는 2011년 대경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전문학사) 학점은행을 통해 2012년 정식으로 학사가 됐다).


4. 그게 아닌데


그는 성공한 연출가인 만큼 소신이 있고,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그게 아닌데’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선 극작과 연출을 겸하는 추세에 대해 그는 회의적이다.

“연출은 텍스트를 파고들고, 의미를 분석하고, 극장 공간성을 연구한다. 그런데 자기가 쓰고 자기가 연출하는 사람은 연출을 하다가 공간성이 안 맞으면 다시 쓰는 경우가 있다. 작가는 이야기와 서사구조에 충실하려고 한다. 그 연극이 극장과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구현되는지에 대해서는 소홀하다. 그러니 중극장 연극을 소극장 연극으로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그는 특히 ‘공간성’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그도 2000년에 처음 대극장 공연(오이디푸스-그것은 인간)을 했을 때, 결국 공간을 채우기에만 급급해서 관객들에게 부담만 준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연출의 영역은 희곡을 만나고, 배우를 만난 다음 관객을 만나기 전에 하나를 더 만난다. 극장이다. 극장의 공간성을 만나야 한다. 그게 제3의 눈이 된다. 우리 후배들이 그걸 간파했으면 좋겠다.”(웹진 ‘연극in’ 2015년 1월)

그는 동시대의 사건 사고들을 곧바로 작품에 반영하는 것에 대해서도 선뜻 찬성하지 않는다.
“블랙리스트 사건 이후 그런 경향이 더 심해진 것 같다. ‘왕위주장자들’은 누구라도 동시대성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수 백 년 전의 이야기다. 이슈를 바로 연극에 가져오는 것이 전부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성취가 있느냐의 문제인데, 그러지 못한 것 같아 현재로선 비판적이다.”

물론 그도 블랙리스트는 ‘국가의 폭력’이라고 단언한다. 신문에는 보도되지 않았지만, 계간지인 ‘연극평론’ 봄호에 따르면 그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 서울시극단 단장으로 오기 전인 2015년 초, 조지 버나드 쇼의 ‘세인트 존’을 명동예술극장에서 올리려 했다는 게 그 이유다. ‘세인트 존’은 잔 다르크가 주인공인데, 이 시대는 잔 다르크조차 불순분자로 보고 있다는 뜻인지 참으로 웃픈 얘기다.


5. 사회의 기둥들

그는 서울시극단의 단장을 맡아 연극계의 기둥역할을 하고 있다.

“서울시극단을 2년 정도 맡으면서 제일 중요하게 대두한 것이 ‘정체성’이다. 그러나 ‘정체성’은 단기간에 형성되지 않는다. 지금은 정체성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고 본다. 그 과정에서 ‘나는 형제다’ ‘함익’ ‘헨리4세’ ‘왕위주장자들’이라는 작품 4개를 무대에 올렸다. 민간극단에서 하기 어려운 대작들이다.”

그래서 물었다. 만약 후임 단장이 와서 당신의 철학을 뒤집어엎으면 어떻게 하나. 그는 즉각 대답했다. “그게 당연하다. 나도 그랬으니까.”

다만 그는 자신이 있는 동안만이라도 ‘예측가능한 시극단’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3년 동안의 프로그램 라인업을 미리 짜고, 모든 작품을 자신이 연출한다고 밝힌 것도 그런 일환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극단이 중극장에서 공연할 때 쓰는 예산이 편당 1억5000만원인데 홍보비로 3000만원을 쓰고 나면 부족하다고 했다(물론 민간극단에 비해서는 큰 액수다). 단원도 적다고 했다. 정단원의 티오는 7명인데 현재 6명뿐이고, 연수단원은 12명. 시즌단원 제도는 청년일자리사업의 일환으로 지난해에 15명을 고용했다가 한 번하고 폐지됐다. 그렇지만 그는 서울시극단의 객석점유율을 평균 30%에서 78%까지 끌어올린 것에 보람을 느낀다.

어려운 연극계를 어떻게 개선할지에 대한 고민도 많다.

“연극판의 가난은 뾰족한 타개책이 없다. 몇몇 연출가와 배우가 스타성을 갖고 있으나, 대다수는 여전히 가난하다. 아직도 ‘밥 먹었냐?’고 인사하는 게 연극판이다. 그래서 서울시극단의 창작플랫폼과 가족음악극 등은 가능하면 후배들에게 맡기고 있다. 만드는 쪽에서 볼 때 한국연극은 궁극적으로 계층이 더 다양화하고, 더 촘촘해져야 한다. 그럴 만한 자리에 있는 선배들이 연출, 배우, 극작가, 디자이너 등 후배들을 끌어줘야 한다. 연대를 이뤄야 한다. 보통 ‘혜화동1번지’를 잘 된 연대로 꼽지만 선배, 또래, 후배들 간에 어느 정도의 연대는 되어 있다고 본다. 공연을 보러 가서 후배를 보고 느끼는 게 있고, 나중에 기회를 주려고 노력하는 것, 그게 연대다.”

김광보는 서울시극단 단장에서 내려오면 극단 청우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청우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다는 것이다. 청우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상당히 안 좋다”고 했다. 그래서 “그럼, 당신만 잘 나가고 있는 것이냐”고 묻자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고 했다.

상만 보더라도 그는 정말로 잘 나갔다. 기록을 살펴보니 개인상과 작품상 등을 합쳐 29개나 됐다. 앞서 소개한 것을 빼고 대표적인 것만 추려 소개하면 이렇다. 2004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올해의예술상 우수작품상(웃어라 무덤아), 연극열전 관객들이 뽑은 최우수 작품상(에쿠우스), 2007년 서울 연극제 대상·연출상(발자국 안에서), 2011년 월간 한국연극 올해의연극 베스트7(주인이 오셨다), 2016년 이해랑 연극상.

당신이 성공한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나.

“치열했다. 치열하게 살았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것이냐는 상투적인 질문에 그도 평범하게 대답했다.

“정신과 육체가 건강하면 언제까지 할 수 있는 직업이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하겠다. 현재로서는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가 없어지면 연출을 놓게 될 것이다.”

“그 반대로, 연출을 못하게 되면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가 없어지는 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같은 말”이라고 했다.

사실 그에게 연출을 오래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르겠다. 그는 ‘김도진’이 되길 희망한다. ‘김광보’와 그의 롤모델인 러시아 연출가 ‘레프 도진’을 합친 말이다. 김광보는 2001년에 내한한 레프 도진의 ‘가우데아무스’를 보고 그의 통찰력에 탄복했다. 그리고 그를 닮기로 했다. 내년쯤에 있을 그의 100번째 작품의 한 자락에서 그 꿈이 서서히 여물고 있음을 확인해 보고 싶다.

(김광보가 연출한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지상으로부터 20미터’ ‘종로고양이’ ‘꽃뱀이 나더러 다리를 감아보자 하여’ ‘처녀비행’ ‘뙤약볕’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봄소풍’ ‘네 개의 악몽’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인류 최초의 키스’ ‘나생문’ ‘헨리4세’ ‘당나귀들’ ‘프루프’ ‘웃어라 무덤아’ ‘에쿠우스’ ‘억척어멈과 자식들’ ‘발자국 안에서’ ‘블라인드 터치’ ‘뮤지컬 햄릿’ ‘인간의 시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루시드 드림’ ‘내 심장을 쏴라’ ‘주인이 오셨다’ ‘게와 그녀와 이웃 일본인’ ‘지하생활자들’ ‘M Butterfly’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내 이름은 강’ ‘그게 아닌데’ ‘싸움꾼들’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스테디 레인’ ‘은밀한 기쁨’ ‘줄리어스 시저’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사회의 기둥들’ ‘중독’ ‘프로즌’ ‘’뮤지컬 신과 함께‘ ’나는 형제다‘ ’살짝 넘어갔다가 얻어맞았다‘ ’헨리4세 1부 2부-왕자와 폴스타프‘ ’데블인사이드‘ ’함익‘ ’왕위주장자들‘ 등)

심규선 기자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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