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계 요구 쏙 뺀 ‘반쪽 권고안’… 노조 정치투쟁 더 거세질 우려

유성열 기자 , 박은서 기자

입력 2018-11-21 03:00 수정 2018-11-2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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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노위 “해고-실업자 노조 허용”]공익위원들만 따로 발표

20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산하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의 박수근 위원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공익위원 권고안을 공익위원들과 함께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여러 차례 약속했다. 대통령이 된 뒤 “사회적 합의를 거쳐 국내법을 정비한 뒤 핵심협약을 비준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따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공식 출범을 하기 전인 올해 7월부터 노사 대표와 공익위원으로 구성된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를 만들어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노사정 합의에 나섰다.

그러나 ILO 협약 비준 자체가 노조의 권리만을 대폭 확대하는 것이어서 처음부터 합의가 어렵다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익위원들이 단독으로 권고안을 발표한 것은 정부가 협약 비준을 밀어붙이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경영계는 논의 테이블 자체가 노동계에 치우친 ‘기울어진 운동장’이어서 경영계의 요구가 반영될 틈이 없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 노동계의 정치투쟁 강화되나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 공익위원 8명이 20일 발표한 권고안에는 △해고자, 실업자의 노조 가입 허용 △노조설립신고 제도 폐지 등 노조의 권리를 크게 확대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 권고안대로 관련법이 개정되면 현재 법외노조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합법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전체 근로자의 10.3%에 불과한(2016년 기준) 노조 조직률이 대폭 상승해 양대 노총의 힘이 더 막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양대 노총이 ILO 협약 비준을 줄기차게 요구해온 것 역시 자신들의 세를 불리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나온다.

경영계는 가뜩이나 정치투쟁으로 치닫고 있는 국내 노동운동이 한층 더 정치화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해고자와 실업자의 노조 가입이 허용되면 외부 정치세력이 노조에 쉽게 가입해 노조를 정치투쟁의 수단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 노동권을 확대하기 위한 ILO 협약 비준이 ‘노동운동의 정치화’를 가속화하는 부작용만 키울 수 있는 셈이다.

권고안에는 또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과 이를 목적으로 한 파업을 원칙적으로 허용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노동운동가가 대부분인 노조 전임자들의 권한과 힘을 더욱 강화해 주는 내용으로 기업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ILO 협약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며 “(권고안이) 협약을 과잉 해석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 경영계 요구는 전혀 반영 안 돼

경영계는 ILO 핵심협약 비준 조건으로 △파업 중 대체근로 허용 △단체협약 유효 기간 연장(현재는 대부분 1년 단위임) △파업 시 직장 점거 금지 등을 요구해 왔다. 노조의 권리만 확장하지 말고 사용자의 대응권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다.

독일 미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은 파업 중 대체근로를 허용한다. 단체협약 유효 기간 역시 미국과 독일은 규제하지 않는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ILO 핵심협약 비준이 국내법을 ‘글로벌 스탠더드(국제적 기준)’에 맞추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 요구도 반영하는 게 순리”라고 했다. 그러나 경영계의 요구는 이번 권고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의 구성 자체가 최저임금위원회처럼 노동계 편향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권고안을 만든 공익위원 8명 중 위원장인 박수근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비롯해 상당수가 진보 성향으로 분류된다. 특히 박은정 공익위원(인제대 공공인재학부 교수)은 최저임금위에서도 공익위원을 맡아 2년 연속 대폭 인상을 주도했다.


○ ILO 비준과 탄력근로제 확대 맞바꾸나

공익위원 권고안의 발표 시점을 두고도 뒷말이 나온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은 21일 총파업에 들어간다. 그 하루 전날 공익위원들이 노동계의 요구를 대폭 수용한 권고안을 내놓은 것이다.

최근 정부와 노동계는 탄력근로제 확대를 두고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정부가 탄력근로제 확대로 불거진 노동계와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 ILO 핵심협약 비준이라는 ‘당근’을 노동계에 제시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상식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노조는 어느 나라보다 강성”이라며 “(ILO 협약 비준을) 성급하게 추진하기보다 일정 기간 의견 수렴과 보완 과정을 거쳐 신중하게 추진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유성열 ryu@donga.com·박은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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