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용의 다른 경제]‘질서 없는 경제’를 바란다

홍수용 논설위원

입력 2016-12-07 03:00 수정 2016-12-0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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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용 논설위원
 박근혜 정부 초기 재벌가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다는 고위 관료에게 “대기업이 새 정부에 뭘 바라는 것 같던가” 하고 물었다. 그는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했다. 정권은 뭔가를 베풀어주는 대신 기업이 사회공헌 활동으로 호응하는, 암묵적 질서를 기대하지만 기업의 속내는 다 귀찮다는 것이었다.


창조를 분배한 朴정부

 지금 대통령의 ‘질서 있는 퇴진’을 강조하는 목소리에는 혼란에 대한 불안감이 묻어 있다. 퇴진 계획표를 못 박아두지 않으면 광장의 분노가 정치를 집어삼킬 것이라는 경고다. 하지만 질서를 강조할수록 혼란이 커지는 걸 보면 진실이 뭔지 헷갈린다.

 박정희, 박근혜 정부는 경제와 관련해 같은 길 위에 있다.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재벌의 수출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법인세를 대폭 감면해줬고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명분으로 자동차 조선 항공 운수 분야에 걸쳐 특혜성 지원을 했다. 재벌이 특혜를 토대로 성장하고 그 과실을 정권과 나누는 정경유착의 모델이 현 정부로 이어졌다. 제왕이 영주에게 땅을 나눠주고 영주는 그 땅을 농노에게 빌려줘 소작하도록 하고 소작의 산물을 권력의 크기 순으로 분배하는 봉건시대의 장원경제와 구조가 같다. 한강의 기적은 정주영, 이병철의 기업가 정신에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기득권 보호장치가 맞물려 돌아가면서 수직적 질서를 이룬 결과물이다.

 이런 경제적 질서와 ‘질서 있는 퇴진’으로 언급되는 정치적 질서는 태생이 같다. 언뜻 연결이 안 되겠지만 기득권층이 쌓아온 정치경제적 진입장벽이 이들 질서의 근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쉽다. 신뢰가 바닥까지 떨어진 상황이라면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야 하지만 변화 자체를 두려워하는 게 ‘질서주의자’의 속성이다.

 정치적으로 다음 대통령을 뽑기 위한 최소한의 여유가 필요할 수 있다. 탄핵은 질서 있는 퇴진의 방법이다. 그러나 ‘박근혜표’ 창조경제를 계속 질서 있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경제를 과거로 돌리는 것이어서 위험하다. 박근혜 정부는 전국 창조경제혁신센터를 대기업들이 운영하도록 떼어줬다. 경북과 대구의 정보기술(IT)은 삼성, 대전의 기술사업화는 SK, 광주의 수소연료전지는 현대차 등 창조를 분배했다. 창조는 초가지붕을 기와로 교체하는 산업화 시대의 새마을운동으로는 불가능한 가치라는 걸 박 대통령은 몰랐다.

 정부가 확장적 재정으로 성장률을 조금 높이는 데 전력투구하는 걸 보면 시야가 좁은 건 경제부처도 마찬가지다. 향후 세계는 불황으로 달리는 폭주기관차다. ‘미국 트럼프가 돈을 푼다→미국 재정적자가 늘어난다→금리와 달러 가치가 오른다→세계 경제가 불황에 빠진다→주변부인 한국은 손도 쓰지 못하고 위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는 공포의 여정이다. 10조 원을 더 써서 성장률 0.2%포인트 올리는 게 무슨 의미인가.


기업 ‘놀이터’ 만들라

 정부가 대기업을 지원하고,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억지스러운 상생이 급한 게 아니다. 기업이 마음껏 뛰어놀도록 하는 놀이터를 만들라. 놀이터에서 놀고 깨지도록 내버려둬야 우버, 샤오미, 에어비앤비가 나온다. 면세점만 해도 모든 사업자가 각자 확보한 제품을 면세로 팔 수 있도록 허용하고 전산으로 관리하면 그뿐이다. 이러면 중소기업 제품의 판로가 열리지만 기존 질서에 갇혀 있으니 엄두도 못 내는 것이다. 기득권 보호를 전제로 한 ‘질서 있는 경제’만을 고집한다면 대기업 총수 청문회는 또 열릴 수밖에 없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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