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언의 마음의 지도]욕망 불안 갈등과 함께 사는 법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의대 교수

입력 2017-02-17 03:00 수정 2017-02-1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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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자아, 超자아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의대 교수
프로이트 박사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무의식이라고 하는 개념을 바탕으로 마음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무의식, 전의식, 의식’으로 구성되는 지형이론을 만들어냈지만 그것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정신 증상들과 연이어 부딪쳤습니다. 고민 끝에 그는 이론의 틀을 바꾸었습니다. 이를 구조이론이라고 하는데 마음에는 이드, 자아, 초자아라고 하는 세 기능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들이 항상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마음이라고 하는 무대에서 세 배우가 서로 주고받는 결과가 마음을 움직인다고 보는 겁니다. 그들 간의 균형이 무너지면 마음이 불편하거나 정신 증상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구조이론의 등장으로 지형이론이 폐기된 것은 아닙니다. 상호보완적이어서 지금도 두 이론은 정신분석학의 주요 이론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구조이론? 어렵지 않습니다. 풀어보겠습니다. 우선 이드, 자아, 초자아라는 말이 프로이트의 언어였던 독일어(모국 오스트리아의 표준어)로는 그저 ‘그것, 나, 나의 위’인 것을 알고 가면 더 쉽습니다. 이드는 그야말로 무의식에 살면서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아서 ‘그것’으로 불렀습니다. 온갖 욕구와 소망의 덩어리를 말하는데 대표 선수로는 성욕과 공격성이 있습니다. 초자아(나의 위)는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녀석인데 한쪽에는 도덕과 양심을 갖추고 있고 다른 쪽에는 자아 이상을 포함합니다. 더 풀어내면 ‘하지 말아야 할 것’과 ‘되고 싶은 것’의 집합입니다. 자아(나)는 달콤한 것 달라고 보채는 이드와 단것은 건강에 좋지 않다고 경고하는 초자아, 그리고 주머니 사정(현실 여건)의 셋 사이에 끼여 달래면서 해법을 고민하는 역할인데, 그러니 타협과 중재가 전문입니다. 초자아와 자아는 일부는 의식에서, 나머지는 무의식에서 활동합니다.

이드가 과하게 설치면 어떻게 될까요. 욕망의 화신이 됩니다. 자제되지 않는 성욕은 성매매, 성희롱, 성폭행으로 이어질 겁니다. 브레이크 없는 공격성은 보복운전, 경찰관 폭행으로 연결되고 결국 법의 처벌을 받을 겁니다. 이드가 너무 위축되어 있다면? 남들은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고 칭송하겠지만 삶이 무미건조하겠지요.

초자아가 성장을 멈추었다면? 극단적으로는 연쇄살인범, 정도가 조금 약하면 도둑이나 사기꾼이 됩니다. 초자아가 성장했지만 스위스 치즈처럼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평소에는 멀쩡하다가 어떤 경우에는 과감하게 비도덕, 비양심, 불법 행위를 저지릅니다. 그렇다면 초자아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좋을까요? 너무 그러면 길에서 주운 10원짜리 동전 하나를 손에 들고 파출소에 전해 주지 않았던 것을 밤새 고민하게 됩니다. 자아 이상이 왜소하다면? 대통령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이루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고, 그저 하루하루 보낼 뿐입니다. 자아 이상이 너무 팽창된 경우에는 현실과 동떨어져서 ‘위대한 사람’이 되는 허망한 꿈을 매일 꾸게 되겠지요.

자아가 힘을 키우지 못한 경우는? 너무 약한 자아로는 세상의 풍파를 견뎌낼 수 없습니다. 남들에게 쉽게 휘둘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끌려가서 수년간 노예 아닌 노예로, 월급도 못 받으며 살아 온 사람의 경우입니다. 끌려가지는 않아도 스스로 사로잡힌, 신경증(노이로제) 환자가 됩니다. 더 심하게 무너지면 정신병에 걸립니다. 자아의 힘이 충분해야 무의식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욕망의 압력과 이를 견제하고 처벌하려는 초자아의 아우성과 현실의 여건 사이에서 견디면서 건강하고 생산적인 해법을 만들 수 있습니다. 자아는 ‘갈등 관리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아는 갈등 관리에 방어기제라고 하는 ‘미사일’ 시스템을 사용합니다. 아주 여러 종류가 있는데 유치한 것도, 성숙한 것도 있습니다. 유치한 것 중 하나는 눈을 감는 겁니다. ‘부정’이라고 합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덮는 겁니다.

‘투사’도 있습니다. 내 탓이 아닌, 남 탓을 하며 안도하는 겁니다. ‘억압’이나 ‘억제’는 “기억이 안 난다”입니다. 억압은 무의식의 산물이라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고, 억제는 의식적으로 모르는 척하는 겁니다. 아주 성숙한 기제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던져서 남을 돕는 ‘애타적 행위’가 있는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비교적 성숙한 행위로는 ‘승화’가 있습니다. 칼을 휘둘러 남을 해치고 싶은 공격성을 돌려서 환자를 돕는 외과의사가 된다면 승화시킨 겁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자라서 어른이 되어 참된 삶을 살아갈 수 있으려면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성장 환경이 필수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쓸데없는 불안에 사로잡힙니다. 배고프다고 보채면 늘 야단맞는 환경이라면 이드는 위축됩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너무 받아주면 버릇없는 아이로 자랍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대중식당에서 도대체 남들도 같이 있는 자리인지 자기네 집 거실인지를 구별 못 하는 아이들이 부쩍 늘어난 걸 봅니다. 말리지도 않지만 기껏 말리는 부모의 음성이 더 시끄럽습니다. 초자아가 발동해서 옆에서 아이들을 저지하다가는 부모의 이드와 부딪쳐서 큰 싸움이 납니다. 그렇다고 아이를 너무 야단쳐서 키우면 초자아가 경직됩니다.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느 정도 배짱과 용기도 있어야 하는데 소심한 사람으로 자랍니다.

자아 기능도 제대로 키워주어야 합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부모, 학교, 사회는 갈등 관리를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자아가 제대로 성장하려면 적절한 시기에 적당한 만큼 좌절을 겪어야 합니다. ‘금수저’로 태어나서 쭉 그렇게 산다면 정말 좋을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환경에서는 오히려 자아가 제대로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자 부모를 둔 자식들이 잊을 만하면 안 좋은 사건으로 뉴스에 등장합니다. 스스로 ‘흙수저’라고 비관할 이유가 없습니다.

개인의 정신건강은 이드, 자아, 초자아의 균형에 달려 있습니다. 사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한쪽은 이드로 행동하고 다른 쪽은 초자아로 공격하면서, 자아는 실종된 모습을 되풀이하고 있어 마음이 답답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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