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변호사월드컵 사상 첫 우승 이끈 ‘외팔이 변호사’ 김선국 [양종구 기자의 100세 시대 건강법]

양종구기자

입력 2019-01-12 14:38:00 수정 2019-01-12 17:2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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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열린 세계변호사월드컵에서 축구장을 누비고 있는 김선국 변호사. 김선국 변호사 제공
김선국 변호사(58)는 평생 축구와 함께 하고 있다. 그렇다고 축구선수 출신은 아니다. 돌이 되기도 전 화재로 오른팔을 잃어버린 뒤 축구가 유일한 친구였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공을 차기 시작해 초중고대학을 거쳐 사법고시 공부, 그리고 변호사로 활약하면서도 늘 그의 곁에는 축구공이 있었다. 축구가 있었기에 건강하고 성공적인 삶도 개척할 수 있었다.

“어럴 때부터 아이들하고 어울려 축구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축구화도 없어 거의 맨발로 공을 찼지만 즐거웠다.”

부모님이 이북 출신인 김 변호사는 서울 용산에서 태어나 초중고를 신림동과 봉천동에서 다녔다. 팔이 없다는 것 때문에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인생을 사는데 장애가 된 적은 거의 없었다. 그의 옆엔 항상 축구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축구는 나를 바로 서게 했고 세상과 어울리는 법을 알려줬다. 왜 놀리는 애들이 없었겠나. 그래도 불편한 티 없이 열심히 달리고 하니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낼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주위 사람들이 부담스런 ‘동정의 눈길’을 보낼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런 시선을 이겨낼 수 있게 한 친구가 축구였다. 고등학교 시절 자칫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었는데 축구로 이겨냈다. 축구를 하면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김선국 변호사 사무실에서.
축구 실력도 남달랐다.

“축구부가 있는 남강고를 다닐 때였다. 축구선수들과 경기를 해도 내가 밀리지 않았다. 솔직히 내가 더 빠르게 움직여 그 선수들을 제치기도 했다. 1학년 때 교내 청백전이 열렸다. 1,2,3학년이 다 참여했다. 3학년 형들에게 밀려 전반에는 뛰지 못했지만 후반에 출전해 2골을 넣었다. 그 때부터 선생님들은 ‘김선국’하면 ‘축구 잘하는 아이’로 기억했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학교를 찾았더니 한 선생님께서 ‘아 그래 너 그때 진짜 축구 잘했는데’라고 말하더라.”

축구를 하면 공부가 더 잘 됐다.

“1991년 사법고시 2차 시험을 2일 앞두고 축구를 하러 간 적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선국이가 사시를 포기했나’고 말할 정도였다. 난 그 때 축구를 안 하면 몸이 근질근질해 공부가 안 됐다. 그래서 갔는데…. 그해 합격한 뒤 기분이 좋아 신림동 맥주집에 갔더니 축구동호회 사람들이 ‘야 선국아 너 떨어졌지? 빨리 와서 한잔해라. 위로주 살게’라고 해 열이 받아 ‘야 합격해서 기분 좋아 왔는데 무슨 소리야’라고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주변사람들은 날 고시준비생이라고 안 보고 ‘고시를 빙자한 축구선수’라고 여겼다.”

사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1984년 사법고시 1차에 합격했고 2차는 1991년 최종 합격했기 때문이다.

“사시 최종합격에 늦은 것은 축구 때문이 아니었다. 솔직히 공부하는 법을 잘 몰랐다. 한번은 이런 경우가 있었다. 대학 4학년 때 사법고시에 최종 합격한 학생하고 얘기하는데 책에 나오는 내용을 물었더니 ‘그런 것을 왜 공부하느냐? 시험에 안나오는데’라고 하더라. 난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다 봤다. 그것도 몇 번을 더 봐야 이해했다. 좀 무식하게 공부했다. 하지만 축구가 있었기에 묵묵히 공부하며 사시에 합격할 수 있었다.”

지난해 열린 세계변호사월드컵에 출전했을 때 모습. 김선국 변호사 제공.
그만큼 축구가 좋았다. 축구를 하면 에너지가 솟아 공부도 잘 됐다. 능률도 올랐다. 스트레스도 해소됐다.

김 변호사는 사법고시를 준비할 때부터 신림동 신성초등학교에서 ‘신성축구회’를 만들어 거의 매일 공을 찼다. 학교 교사와 택시기사, 당구장 및 음식점 주인, 고시준비생 등이 주축이었다.

“매일 공부만 해야 하는데 축구가 유일한 탈출구였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회원들과 어울리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때 공을 함께 찼던 고시생들이 어느 날 법조인이 돼서 나타나기도 했다.”

변호사가 된 뒤에는 서울변호사회에서 ‘서로(Seoul Lawyers)축구단’을 만들어 공을 차고 있다.

“변호사 초창기 시절 서울변호사회축구단에 가입했는데 지지부진했다. 그 때부터 내가 회장을 맡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내가 10년 넘게 회장을 하며 기틀을 다졌다. 뭐 ‘너무 오래 독재하는 것 아니냐’라는 말에 이젠 뒤에서 지원하고 있다.”

주말 축구 시작하기 전 모습. 김선국 변호사 제공.
서로축구단은 2001년 탄생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초대회장인 김연호 변호사 등이 주축이 돼 ‘한일 변호사 우호 교류’를 위해 만들 때 김 변호사도 함께 했다. 2003년부터 김 변호사가 서로축구단 회장을 맡아 10년 넘게 이끌었다.

서로축구단 회원은 60명이며 운동장에 적극적으로 나오는 회원이 40명 정도다. 매년 상반기 서울지방변호사회장배, 하반기 전국변호사협회장배 축구대회에도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김 변호사는 2006년부터 세계변호사월드컵(MUNDI AVOCAT)에 출전하기 시작해 지난해까지 7회 연속 출전했다. 지난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사상 처음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지난해 러시아 월드컵을 한 달 여 앞두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40개국 140개 팀, 2500여명의 변호사들이 참가하는 제19회 세계변호사월드컵이 열렸다. 그동안은 30대, 40대 팀으로 나뉘어서 우리가 우승할 기회가 없었다. 솔직히 다른 나라 30대, 40대 변호사들은 정말 축구를 잘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55세 이상 ‘슈퍼 레전드’ 부문이 생겼다. 그래서 우리도 해보자 해서 출전했다. 55세 이상에서는 해볼만 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우리가 우승했다.”

변호사 월드컵은 1983년 모로코에서 처음 시작한 후 1984년부터 2년마다 열리고 있다. 한국의 역대 최고 기록은 8강 진출이었다. 김 변호사는 ‘코리아 슈퍼 레전드’팀의 단장을 맡았다.

“현장에 가보니 한국을 제외한 참가팀 7팀 중 6팀은 아르헨티나, 1팀은 브라질이었다. 이번에도 우승은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남미팀 선수들도 배나오고 늙긴 매한가지다. 한번 붙여보자’고 우리 선수들을 독려했다.”

아시아변호사축구대회에 참석했을 때 모습. 김선국 변호사 제공.
한국은 5승 2무, 골득실차 15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우승했다. 2위의 아르헨티나 ‘산 이시드로’팀 역시 5승 2무였으나 골득실차 7로 한국팀에 뒤졌다. 김 변호사는 첫 경기에서 출전 12년 만에 감격적인 첫 골을 넣기도 했다.

“상대가 아르헨티나 ‘모론슈퍼시니어’였다. 1-1 상황에서 공세로 전환하며 수비가 약해진 틈을 파고들었다. 골대 앞에서 넘어지며 패스 받은 공을 슬라이딩 슛으로 넣었다. 우리가 3-1로 이겼다. 우리는 첫 승리에서 자신감을 얻어 계속 잘 나갈 수 있었다.”

김 변호사는 요즘도 주 2회 공을 찬다. 계속 이어지는 재판으로 받은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는 유일한 장이 축구장이다. 변호사로서 경쟁하여야 하고 또 지면 안 된다는 처절한 중압감에 시달린다. 그럴 때 동료들과 어울려 축구를 하다보면 그런 스트레스가 날아간다.

“재판이라는 게 잘되기도 하지만 잘못된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잠 못들 정도로 괴로울 때도 있다. 하지만 주말마다 축구장에 나가 공을 차다보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지난해 열린 세계변호사월드컵에서 우승한 뒤 우승컵을 들고 웃고 있는 김선국 변호사. 김선국 변호사 제공.
축구로 함께 사는 법도 배웠단다.

“지금도 혼자서 축구화 끈을 매기 곤란하고 드로잉도 못하는 등 불편함이 있지만 그래서 더 동료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어릴 때부터 남의 도움을 받다보니 세상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내가 축구에서 달리기와 몸싸움으로 팀에 기여하는 것처럼 세상에서도 남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는 신체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매사에 자신이 넘쳐흐른다. 그리고 늘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에게 축구가 있기 때문이다. 김 변호사는 죽기 전까지는 운동장에 나가겠다는 각오다.

“신성축구단은 10여 년 전부터 일요일 광신고에서 공을 찬다. 광신고로 옮기며 광신축구단으로 개명했다. 서로축구단은 토요일 상문고에서 공을 찬다. 이젠 체중도 늘고 체력도 떨어져 날렵하게 공을 차진 못하지만 아직도 공을 차며 땀을 흘려야 다음 1주일을 잘 버틸 수 있다.”

아내로부터 ‘당신은 가족보다도 축구가 더 좋나요’라는 핀잔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에겐 어김없이 ‘휴일은 축구하는 날’이다. 그에게 축구없는 삶은 의미가 없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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