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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는 시장에 민첩하게 대응… 글로벌기업, 대규모 공채 없어

김현수 기자 , 김지현 기자 , 김재희 기자 , 김도형 기자
입력 2019-02-14 03:00:00업데이트 2023-05-09 20:45:43
#1. 경영/원가기획

수행 직무: 친환경차 등 전략차종 수익성 검토 및 관리

지원 자격: 상경계열 또는 사회과학계열 전공자

#2. 연구개발(R&D)/연료전지시스템 기술경영

수행 직무: 수소·연료전지 신기술 기획

꼭 지원해 주세요: 끈기를 가지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

13일 현대자동차 채용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대졸 신입사원 채용 공고문이다. 현대차는 지난해 5월부터 R&D 직군과 경영관리 일부 직군에 대해서는 정기 공개채용(공채)과 별도로 상시 채용을 해왔다. 현대·기아차는 정기 공채를 폐지하는 대신 이 같은 상시 공채를 전 직군으로 확대한다.

현재 올라와 있는 신입사원 채용 공고는 부서마다 제각각이다. 필수 전공을 명시한 부서도 있고 ‘꼭 지원해 주세요’라는 항목에 팀에서 원하는 인재상을 제시한 곳도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현업에서 필요한 인재를 뽑는 거라 우대사항, 자격조건이 제각각”이라며 “본사가 일괄해 뽑는 것과 달리 각 부서에 맞는 인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정기 공채 폐지에 따라 사실상 ‘현대자동차인적성검사(HMAT)’도 사라지게 됐다.

○ “상시 채용, 기업-취업자 만족 높아”


현대차그룹은 계열사별 채용 인원은 밝히고 있지 않지만 매년 8000명 안팎을 채용하며 이 중 80%가량을 대졸 신입사원 정기 공채로 채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기아차는 지난해부터 수소차 분야 등 일부 직군에 상시 채용 제도를 시범 운영해 왔다. 현대차그룹은 이미 사장단 인사에는 수시 인사 체제가 정착됐다.

계열사 중에서는 현대모비스가 지난해 하반기 공채에 처음으로 현업 주도 채용 제도를 도입했다. 현대모비스 관계자는 “부서별 전문성에 따라 현업 부서가 직접 사람을 뽑다 보니 입사자도 원하는 직무를 할 수 있어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이 채용 제도를 두고 각종 실험을 시도한 배경에는 정보통신기술(ICT)과 융합한 자동차 시장의 급변이 있다. 구글은 석 달마다 인사를 하고 팀이 생겼다 없어졌다를 반복한다. 그만큼 시장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기존 부서 체제가 아닌 프로젝트 단위로 움직이는 애자일(Agile·민첩한) 경영 체제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정기 인사, 1년에 두 번 정기 채용이 불가능하다. 현대차는 정기 공채를 없애면서 애자일 조직 체계를 도입할 예정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은 신년사에서도 일하는 방식의 변화를 주문한 바 있다.

BMW, 메르세데스벤츠 등 글로벌 기업은 대졸 신입사원 대규모 공채 제도가 아예 없다. 최근에는 인재가 몰리는 지역에 연구소를 세우는 등 인재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가 정보기술(IT) 분야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미국 실리콘밸리에 연구소를 세운 사례가 대표적이다.

○ 채용 패러다임 바뀌나

주요 글로벌 기업이 이미 수시 채용으로 운용되는 상황에서 재계에서는 현대차그룹이 국내에서도 수시 채용 실험의 ‘총대’를 멨다고 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중견기업은 이미 수시 채용 체계로 바뀌었지만 대기업은 ‘채용을 줄이려는 것 아니냐’는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채용 제도에 손을 대지 못해 왔다”고 말했다. 현대·기아차가 수시 채용을 전면 도입함에 따라 다른 기업들도 정기 공채 축소, 수시 채용 확대로 채용 전략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국내 주요 기업마다 정기 공채를 대체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거듭해 왔다. 정기 공채 때마다 청년 10만 명 가까이 지원하면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는 지적이 이어져 온 데다 기업 입장에서도 수많은 지원자가 동시에 몰리면 숨어있는 우수 인재를 골라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직률도 문제가 됐다. 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대규모 공채 후 부서 배치 과정에서 원하는 직무를 맡지 못한 신입사원들이 이직하면 회사로서는 엄청난 비용 손실”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채용 규모 위축과 공정성 논란 우려다. 실제 삼성전자는 2014년 1월 대학 총장에게 인재를 추천받는 ‘대학 총장 추천제’를 발표하며 정기 공채 위주의 입사 제도 개편에 나섰지만 대학 서열화와 지역 차별 논란이 불거지면서 결국 전면 유보됐다. 삼성 계열사들은 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이 해체된 이후 그룹 공채는 폐지했지만 계열사마다 삼성직무적성검사(GSAT)는 동일하게 치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성장이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매년 1만 명 안팎의 공채 규모를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다만 현대차 관계자는 “신입사원 채용을 ‘정기’에서 ‘상시’로 시기만 바꾸는 것일 뿐 채용 인원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취업문 더 좁아질까 걱정” “지원기회 더 늘어날 것” ▼

불안-기대 엇갈린 취준생들

대졸 신입사원 채용의 ‘큰손’인 현대자동차그룹이 정기 공개채용(공채)을 전격적으로 폐지한다는 소식에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입사 시험이 각종 ‘스펙’이 필요한 대입 학생부종합전형(학종)처럼 변해 맞춤형 준비가 필요해질 것이란 불안감부터 채용에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느냐는 의구심까지 제기되고 있다.

공채 폐지 소식을 접한 서울대 경영학과 재학생 박모 씨(23)는 “대학 입시에서의 ‘학종’처럼 ‘이 직군에 붙으려면 이런 스펙을 쌓아야 한다’는 시나리오가 만들어져 취준생들이 맞춤형 준비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입사하고 싶은 기업과 직무에 맞춰 수업을 듣고 동아리 활동도 그에 맞춰 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어점수와 자격증 등 이른바 ‘필수 스펙’을 중심으로 취업을 준비해 온 대학 졸업반과 이미 졸업한 취준생들은 걱정이 더 컸다. 2년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최근 취업 준비를 병행하기 시작했다는 한 국립대 재학생 A 씨(27)는 “이제 막 대기업 인적성 스터디를 시작했는데 나 같은 졸업 유예생이 지금부터 특정 직군의 전문성을 쌓는 건 불가능하다”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일찍부터 준비하려고 해도 기업이 요구하는 전문성을 기를 수 있는 인턴 근무나 직무교육 여건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지방 사립대 4학년 홍정민 씨(23·여)는 “그나마 직무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인턴을 ‘금턴’이라 부를 정도로 기회가 적은 상황에서 인턴 기회는 늘리지 않으면서 다른 곳에서 일을 배운 경력자를 뽑겠다는 이기심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전문성을 입증할 수 있는 경력이 더 중요해지면 결국 가정환경이 좋은 이른바 ‘금수저’에게 유리한 채용 전형이 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와 함께 공정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지원하는 직무와 무관한 스펙을 쌓을 이유가 없어지고 본인 역량과 준비에 맞는 직무에 지원하는 채용 방식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자리를 잡을 것으로 본다. 면접에 인사 담당자가 참석하고 채용 이후 인사 부서가 직접 채용 과정을 검증하는 방식으로 공정성을 담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수시 채용으로 채용 기회 자체가 오히려 늘어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현대·기아자동차에 따르면 각 채용 공고의 서류심사 기간이 겹치지 않으면 여러 부서 채용에 지원해도 된다. 지난해 8월 졸업한 취준생 우영희 씨(27)는 “취업을 준비하면서 가장 답답했던 건 공채시즌이 끝난 뒤 찾아오는 상실감이었다”며 “상시 채용을 하면 지원 기회는 더 자주 생기기 때문에 경쟁률과는 별개로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현수 kimhs@donga.com·김지현·김재희 jetti@donga.com·김도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