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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19세기말 ‘자동차의 도시’ 리옹을 가다

동아닷컴 정진수 기자
입력 2018-04-20 09:23:00업데이트 2023-05-09 22:18:56
앙리 말라르트르 자동차박물관은 리옹 시내에서 북쪽 뮈제 거리(Rue du Musée)에 세워진 ‘로슈타유레 쉬르 손 성’을 전시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앙리 말라르트르 자동차박물관은 리옹 시내에서 북쪽 뮈제 거리(Rue du Musée)에 세워진 ‘로슈타유레 쉬르 손 성’을 전시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프랑스 리옹 시내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약 12km 떨어진 한적한 시골마을. 오르막길 끝자락에 다다르자 드넓은 마당을 갖춘 오래된 성 하나가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입구 매표소를 보니 목적지인 ‘앙리 말라르트르 자동차박물관(Musée de l'automobile Henri-Malartre)’에 도착한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예상했던 그림과는 전혀 다른 흥미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현대식 건물 속 일반적인 자동차박물관을 상상하고 갔지만 오로지 성 외에는 이러다할 전시 공간을 찾기 어려웠다. 멀리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 몇 개만 보일뿐이었다.
앙리 말라르트르 자동차박물관 1층 입구에 설립자 앙리 말라르트르(1950~2005년)의 초상화가 전시돼 있다.앙리 말라르트르 자동차박물관 1층 입구에 설립자 앙리 말라르트르(1950~2005년)의 초상화가 전시돼 있다.

클라리세 데스피에레스(Clarisse DESPIERRES) 앙리 말라트르트 자동차박물관 디렉터는 “‘로슈타유레 쉬르 손(Rochetaillée-sur-Saône)’이라고 불리는 이 성은 12세기 완공돼 19세기까지 여러 차례 증축 공사를 겪었다”며 “이후 자동차박물관 모습을 갖춰 1960년 대중들에게 처음 공개됐다”고 말했다.

앙리 말라르트르 자동차박물관을 설립한 ‘앙리 말라르트르’는 자동차 관련 분해 및 부품 사업자이자 자동차 수집광이었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부켄 발트 수용소에서 유배생활을 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빼앗겼던 자동차를 다시 돌려받고, 1959년부터 이 성을 구입해 해 본격적으로 자동차 수집에 몰두했다.

1932년 그가 처음 구입한 차량은 1898년식 ‘로체 슈네이더(Rochet-Shneider)’로, 취재진은 같은 회사에서 나온 1909년식 차량을 직접 타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프랑스는 초창기 현대식 자동차 산업을 개척한 국가다. 특히 리옹은 19세기 말 유럽 전체를 통틀어 파리, 독일 바덴 비텐베르크(Bade-Wurtenberg)와 함께 자동차 산업이 발달된 도시로 꼽힌다. 현재는 르노·푸조·시트로엥이 프랑스 완성차 업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 시기 리옹 안에서만 130개의 자동차 메이커가 있었다. 로체 슈네이더도 1889년 설립됐다.

고전영화에서나 볼법한 ‘로체 슈네이더 1909 타입 9000’ 실물은 무척 고풍스러웠다. 차량 곳곳에는 부를 상징하는 금색을 치장해놨고, 손수 바느질로 완성한 수제 시트는 고급감을 전달했다. 궂은 날씨를 대비한 컨버터블 형식 덮게도 마련하는 세심한 배려를 갖춘 차였다.
앙리 말라르트르 자동차박물관 수석 엔지니어와 클라리세 데스피에레스 디렉터(오른쪽)가 ‘로체 슈네이더 1909 타입 9000’ 주행 시연을 하고 있다.앙리 말라르트르 자동차박물관 수석 엔지니어와 클라리세 데스피에레스 디렉터(오른쪽)가 ‘로체 슈네이더 1909 타입 9000’ 주행 시연을 하고 있다.

운전대는 앙리 말라르트르 자동차박물관 올드카 정비를 총괄하는 수석 엔지니어가 잡았다. 시동이 켜진 상태에서 수동 기어를 1단으로 바꾸니 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승차감을 따질 만큼 안정감 있는 주행감은 아니지만, 시대적 배경을 19세기 말로 옮겨보면 당시에는 자동차 등장 자체가 놀라운 변화로 다가왔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속도도 제법 났다. 109년이 지난 현재도 40~50km/h를 거뜬히 넘나들었다. 최고 속도는 시속 70km라고 한다.

클라리세 데스피에레스 디렉터는 “여기에 있는 모든 올드카는 직접 운행이 가능하다”며 “정비 전담 엔지니어가 일주일에 두 세 번씩 전시 차량들을 주행 및 관리해 최적의 상태로 만든다”고 강조했다.

올드카 체험을 마치고 성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자동차박물관은 1972년 리옹 시가 인수하고, 소장품 정비 및 확충 작업을 통해 전문 전시공간으로 성장했다. 이곳에서는 19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전차·택시·모터바이크·자동차 등 교통수단의 역사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1890년에 제작된 세크리탠드 증기차.1890년에 제작된 세크리탠드 증기차.

최초의 자동차는 프랑스인 니콜라스 조솁 퀴뇨(Nicolas-Joseph Cugnot)에 의해 탄생했다. 1769년 증기자동차(Fardier à vapeur)를 완성한 퀴뇨는 사람 넷을 태우고 시속 4km 속도로 파리 시내를 달렸다. 1771년 3개의 바퀴를 가지고 보일러의 증기로 2기통의 엔진을 움직이며 대포와 화물을 뒤에서 운반할 수 있는 구조물이 붙어 있는 ‘퀴뇨의 운반차’를 만들었다. 이 차는 물을 담는 공간이 적어서 주행거리가 짧다는 결점이 있었으나, 피스톤의 직선운동이 연속적인 회전운동으로 변환됐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발명이었다. 1890년에 이보다 더욱 발전된 세크리탠드(secretand)가 등장했지만 증기차의 구조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단종됐다.
1900년식 밀데 전기차.1900년식 밀데 전기차.

뒤이어 전기차도 개발됐다. 챨스 밀데(Charles Milde)는 프랑스에서 가장 잘 알려진 전기 자동차를 만든 인물이었다. 그의 첫 번째 차량은 1898년 3마력 전기 모터에 의해 구동됐다. 후방 차축에 2개의 전동기를 사용하도록 설계된 밀데 첫 번째 전기차는 시속 100km 최고속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 밀데는 1903년 도시용 4륜 구동 전기차 개발을 완료하고, 1914년 전기 상용차로 만들어 판매에 나선 바 있다.
1896년식 라스포우기스.1896년식 라스포우기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스스로 차량을 제작하는 일이 잦았다. 이곳에 전시돼 있는 1896년식 라스포우기스(Laspougeas)도 성직자 리고라(Ligoure)가 직접 만들었다. 이 차량은 평범한 마차 모습과 비슷해 보이지만 하부에 휘발유 엔진을 얹어 최소한의 속력을 낼 수 있도록 설계됐다.
세계 최초 양산차 1892년식 ‘파나르·르바소’세계 최초 양산차 1892년식 ‘파나르·르바소’

프랑스 건축가 르네 파나르와 에밀 르바소는 세계 최초로 양산차를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초창기 자동차산업의 문을 열었다. 이들은 1890~1891년 마차에 엔진을 탑재한 자동차를 만들다가 1892년부터 서로의 이름을 딴 ‘파나르·르바소(Panhard et Levassor)’라는 상표를 붙여 차량을 대량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생산했던 차량에는 독일 고트리부 다임러와 칼 벤츠가 설계한 엔진을 달았다. 파나르·르바소는 1896년 약 100개의 차체 프레임을 생산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20세기 초창기 모터스포츠 대회에 출전한 ‘코레’.20세기 초창기 모터스포츠 대회에 출전한 ‘코레’.

20세기 초 자동차는 진정한 교통수단으로 발전하면서 기술 실험의 장이었던 레이스 대회도 열렸다. 이때 출전했던 레이스카들은 이전보다 차체는 무거워졌지만 엔진 성능 향상 덕분에 시속 70km/h에 도달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전시된 ‘코레(Corre)’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19세기에는 단순 이동수단 개발에 집중했다면 코레를 기점으로 차량의 구조는 보다 더 세밀하게 다듬어졌다. 특히 코레는 이전과 달리 운전석과 조수석 시트가 분리됐으며 포장도로에 맞는 타이어 장착 등 현대식 자동차 모습을 점점 갖춰가기 시작했다.
나치 독일 총통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리옹에서 타고 다녔던 메르세데스.나치 독일 총통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리옹에서 타고 다녔던 메르세데스.

성에서 약 100m 떨어진 또 다른 전시관에 가면 20세기 초중반 출시됐던 차량들을 만나볼 수 있다. 여기는 리옹에서 운행됐던 탈것이 총망라한 곳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흔적도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당시인 1945년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총통이 리옹에 머물면서 관용차로 이용했던 1942년식 메르세데스가 한복판에서 관람객들을 맞았다. 전쟁 기간 중 제작된 이 모델은 최고출력 80마력, 최고속도 128km/h까지 낼 수 있다.

이밖에 이곳에서는 자전거를 비롯해 서민들의 발이 됐던 전차, 초창기 모터스포츠에 출전한 각종 스포츠카 및 AMG·페라리·파가니 등 고성능 모델 등 오늘날의 자동차산업 발전 과정을 세심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전시공간을 운영하고 있었다.

앙리 말라르트르 자동차박물관은 개관 첫해 12만명이 다녀갔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현재는 매년 3만명 정도의 방문객들이 찾는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6시까지다. 입장료는 성인 6유로다.

클라리세 데스피에레스 디렉터는 “앙리 말라르트르 자동차박물관은 근현대 자동차를 한 곳에 모와둔 프랑스 최대 전시 공간”이라며 “리옹에서 발달된 과거 자동차 변천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완성차 산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리옹=동아닷컴 정진수 기자 brjean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