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고급車의 조건… ‘V12’ 심장을 가져라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입력 2018-08-31 03:00:00업데이트 2023-05-09 21:43:20
애스턴 마틴의 새 V12 엔진은 2016년 선보인 DB11에 처음 쓰였다.애스턴 마틴의 새 V12 엔진은 2016년 선보인 DB11에 처음 쓰였다.
자동차의 심장인 엔진은 그 차의 성격을 읽을 수 있는 특징 중 하나다. 특히 엔진 기통 수, 즉 실린더 수는 오랫동안 차의 고급스러움을 가늠하는 기준 중 하나로 쓰였다. ‘그 차는 몇 기통 엔진을 쓰는가’는 차가 얼마나 고급스러운지를 확인하려는 질문을 대신하기도 했다. 기통 수, 즉 엔진의 실린더 수가 많을수록 고급차라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진 탓이다. 실제로도 고급차일수록 실린더 수가 많은 엔진을 썼다.

자동차 업체들은 때로는 높은 출력을 얻으려고, 때로는 엔진이 만들어내는 진동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해 실린더 수를 늘리는 방법을 택했다. 엔진 관련 기술 수준이 낮을 때는 그것이 엔진에서 원하는 특성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엔진 실린더 수가 적은 것과 많은 것의 특성 차이가 뚜렷했다.

엔진 관련 기술이 발전한 이후로는 격차가 많이 줄었지만 실린더 수가 작고 배기량이 작은 엔진과 실린더 수가 많고 배기량이 큰 엔진 사이에는 여전히 물리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높은 출력과 적은 진동이라는 특성이 공존할 수 있는 가장 기본 개념이 실린더 수를 늘리는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대량생산되고 있는 승용차 가운데 엔진 실린더 수가 가장 많은 것은 초호화 초고성능 스포츠카인 ‘부가티 시론’이다. 시론을 움직이는 8.0L 엔진의 실린더 수는 무려 16개다. 1500마력에 이르는 출력으로 2인승 스포츠카를 시속 400km 이상의 속도로 달리게 한다. 이렇게 실린더가 많은 것은 자동차에서도 아주 예외적이어서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최고급차의 엔진은 12기통이 한계다. 실린더가 많을수록 효율이나 성능, 복잡한 구조로 인한 설계와 생산의 어려움 등 여러 면에서 단점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롤스로이스 컬리넌에 쓰이는 V12 6.75L 엔진.롤스로이스 컬리넌에 쓰이는 V12 6.75L 엔진.
12기통 엔진은 대부분 V자 모양으로 갈라진 두 개의 실린더 블록에 실린더가 각각 여섯 개씩 들어 있는 V12 구조로 되어 있다. 다만 폭스바겐 그룹에 속한 벤틀리와 아우디는 W12 엔진을 쓰고 있다. 실린더 수가 12개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엔진 구조가 전혀 다르다. 간단히 말해 V12 엔진은 직렬 6기통 엔진 두 개를, W12 엔진은 직렬 3기통 엔진 네 개를 나란히 묶어 놓은 꼴이다. 종합적으로 보면 어느 쪽이 더 좋고 나쁘다고 이야기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V12 엔진이 태생적으로 공간을 많이 차지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점이다. 엔진이 들어갈 공간과 엔진이 내는 큰 힘을 감당할 수 있는 튼튼한 뼈대를 갖춘 차가 아니면 V12 엔진을 얹을 수 없다.

실용적 관점에서는 흠이 될 수 있는 이런 특성은 럭셔리나 프리미엄 브랜드 차에서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V12 엔진 고유의 장점과 대중적 자동차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함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이 소비자들의 만족감을 더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엔진 기술 발전 덕분에 출력 면에서는 6기통이나 8기통만으로도 V12 엔진을 능가하는 성능을 내는 것도 많다. 무엇보다도 갈수록 강화되는 세계 여러 나라의 배기가스와 연비 관련 규제는 다기통 대배기량 엔진이 설 자리를 점점 좁히고 있다.

기업평균연비(CAFE) 기준을 위반하면 벌금을 내야하는 미국이 대표적인 예다. 생산과 판매량은 적지만 수익을 충분히 내는 럭셔리 및 프리미엄 브랜드들은 ‘기꺼이’ 벌금을 내 왔지만 판매대수에 비례해 벌금 액수가 커지므로 부담도 함께 커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때문에 V12 엔진을 포기하는 브랜드들도 있다. 메르세데스-AMG와 BMW가 대표적이다. 이 두 브랜드는 지금 판매하고 있는 차량 이후로 V12 엔진 모델을 내놓지 않을 계획이다. 고성능 브랜드인 메르세데스-AMG는 이미 V8 4.0L 트윈터보 엔진으로 V12 6.0L 트윈터보 엔진을 능가하는 성능을 낼 수 있다. 엔진이 작고 가벼울수록 역동적인 주행 특성을 만들어내기에 유리한 점도 있다. 물론 메르세데스-벤츠는 브랜드 성격에 따라 미래 전략을 달리하기 때문에 최고급 브랜드인 메르세데스-마이바흐의 최고급 모델인 ‘S 650’에서는 V12 엔진의 명맥이 이어질 것이라고 한다.

BMW의 이유는 좀 더 현실적이다. 배기가스 규제에 좀 더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다. 현재 BMW 브랜드로 팔리고 있는 V12 엔진 모델은 ‘M760Li xDrive’ 하나뿐이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BMW가 조만간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기술로 V12 엔진의 공백을 보완할 것이란 예측을 하고 있다.

사실 판매량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프리미엄 브랜드들에게는 V12 엔진이 계륵 같은 존재이다. 판매 대수가 많지 않은 만큼 개발과 생산에 들이는 비용 대비 수익을 충분히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럭셔리 브랜드 중에서는 V12 엔진에 대한 입장이 굳건한 경우도 많다. 점점 V12 엔진을 포기하는 브랜드들이 늘어나는 흐름 속에서 지금의 V12 엔진 차가 점점 더 특별한 존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롤스로이스는 최신 모델 컬리넌을 비롯한 모든 모델에 V12 엔진이 쓰인다.롤스로이스는 최신 모델 컬리넌을 비롯한 모든 모델에 V12 엔진이 쓰인다.
롤스로이스는 V12 엔진을 고수하는 브랜드 중 하나다. 롤스로이스 수장인 토르스텐 뮐러외트뵈슈는 ‘법규가 허락하는 한’ V12 엔진을 쓸 것이라고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슈퍼카라고 부르는 초고성능 스포츠카를 만드는 회사들도 쉽게 V12 엔진을 포기하지는 않을 듯하다. 람보르기니 최고경영자(CEO)인 스테파노 도메니칼리는 V12 엔진을 람보르기니의 ‘전통과 유산의 일부’라고 말한다. 람보르기니는 현재 크게 세 모델을 만들고 있는데 그 가운데 최상위 스포츠카인 ‘아벤타도르 S’에만 V12 엔진이 쓰인다.

새로 V12 엔진을 개발하는 업체도 있다. 애스턴 마틴은 2016년 새로 선보인 ‘DB11’부터 새로 개발한 V12 5.2L 트윈터보 엔진을 쓰기 시작했다. 애스턴 마틴은 메르세데스-AMG로부터 V8 엔진을 공급받지만 최상위 모델에 쓰는 V12 엔진은 독자적으로 설계하고 생산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DB11을 시작으로 다른 모델에도 쓰일 예정인 새 엔진은 현재 시판되는 승용차에 쓰이는 V12 엔진 중 가장 새것이다. 다른 업체의 엔진들은 대부분 이전에 쓰이던 것을 꾸준히 개선하는 데 그치고 있지만 애스턴 마틴의 것은 거의 백지 상태에서 새로 개발한 것이나 다름없다.

람보르기니도 아벤타도르 S 등에 쓰이는 V12 엔진을 고집하고 있다.람보르기니도 아벤타도르 S 등에 쓰이는 V12 엔진을 고집하고 있다.
V12 엔진을 브랜드의 핵심 유전자 중 하나로 내세우고 있는 곳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페라리다. 페라리가 현재 판매하고 있는 모델 중에는 ‘812 수퍼패스트’와 ‘GTC4 루소’에 V12 엔진이 쓰이고 있다. 페라리는 당분간 V12 엔진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분명하다. 규제에 대응하고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V12 엔진을 지키기 위한 복안도 갖고 있다. 2010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공개한 ‘599 HY-KERS 콘셉트카’는 페라리뿐 아니라 모든 V12 엔진의 미래를 점쳐볼 수 있는 실마리가 될 것 같다. 599 HY-KERS는 당시 시판되고 있던 고성능 스포츠카인 599 GTB의 V12 엔진에 하이브리드 기술을 반영한 차였다. 현재 판매 중인 V12 엔진 모델에는 하이브리드 기술이 반영되지 않았지만 페라리는 필요하다면 언제든 제품화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여러 럭셔리 브랜드의 책임자들은 한결같이 V12 엔진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아직 많은 소비자가 V12 엔진 모델을 고집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하이브리드 같은 전동화 기술을 더하더라도 V12 엔진의 명맥은 이어질 듯하다. V12 엔진은 여전히 특별한 차를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법 같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