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총장 추천제’ 2주만에 백지화… 서열화-차별 논란에 정치권 가세

동아일보

입력 2014-01-29 03:00 수정 2014-01-2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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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기업 채용 놓고 나라가 들썩

삼성그룹이 20여 년 만에 개편한 신입사원 채용제도가 부정적 여론에 휩싸이자 발표 2주 만에 결국 백지화했다.

삼성은 △서류전형 도입 △대학 총장에게 인재 추천권 부여 △찾아가는 열린 채용제도 등을 담은 새로운 채용제도를 전면 유보하겠다고 28일 밝혔다. 이에 따라 예전처럼 일정 기준만 충족하면 누구나 삼성직무적성검사(SSAT)에 응시할 수 있다. 삼성이 15일 채용제도 개편안을 발표한 뒤 유보하기까지 이어진 2주간의 논란은 청년 실업의 심각성과 대기업 쏠림현상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박동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연구위원은 “특정 기업의 채용제도를 두고 온 나라가 들썩이는 건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 호남·여성 차별 논란에 인터넷 괴담까지

지난해 삼성 공채에는 무려 20만 명 이상이 몰렸다. SSAT 준비를 위한 학원과 학습서 출시 등 사교육 시장까지 판을 치면서 ‘삼성 고시’라는 비판이 나왔다. 삼성은 이런 부작용을 줄이고 숨은 인재를 찾겠다며 새 채용제도를 내놨지만 여론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일부 대학은 삼성이 총장 인재 추천장 수를 차별 배분해 “대학의 서열화”를 조장한다며 반발했다. 총장추천제를 거부하겠다는 대학이나 학생회도 나왔다.

대학 줄 세우기 논란에 이어 호남과 여자대학을 차별했다는 지적이 쏟아졌고, 정치권까지 가세했다. 한정애 민주당 대변인은 27일 “삼성이 대학총장의 채용 추천권을 할당하는 오만함을 보이고 있다”고 했고, 강운태 광주시장도 시 간부회의에서 “삼성의 대학총장 추천제는 지역별, 성별 배려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논란은 온라인을 타고 괴담으로 확대됐다. 일부 사이트에서는 ‘삼성 특검 때 김용철 변호사에게 덴 뒤로 호남 사람은 삼성에 들어갈 수 없다더라’ 등 온갖 괴담이 퍼졌다.

결국 채용 개편안이 없었던 일로 되면서 사회적 낭비를 줄이겠다던 삼성의 실험은 후퇴하게 됐다. 삼성 측은 “대학총장 추천제로 각 대학과 취업준비생에게 혼란을 드려 대단히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이에 대해 추천 인원을 적게 할당받은 지방대와 여자대학 등은 “차별 우려가 해소돼 다행”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일부 지방대 학생들은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다. 한 지방대 재학생(24)은 “총장추천제는 그나마 소외된 지방대학 출신에게 기회가 될 수 있었는데 시도도 못한 채 사라졌다”고 말했다.


○ 인재 대기업 쏠림현상 개선해야

이번 논란과 관련해 취업포털 인크루트 서미영 상무는 “요즘은 삼성과 현대차 입사시험도 국가고시급으로 인정받는 분위기”라며 “해가 갈수록 취업준비생들의 대기업 선호도, 그중에서도 삼성, 현대차 등 이른바 ‘빅2’에 몰리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주섭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일부 대기업 채용에 사회 전체가 목을 매는 현상은 개별 기업의 노력만으로 쉽게 개선할 수 없는 문제”라며 “장기적으로는 직업교육을 강화해 지나치게 높은 대학 진학률을 낮추고 직업학교 진학을 활성화해야 하며 우수한 중견·중소기업들이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유지-절충-폐지 놓고 한밤 난상토론… 이튿날 아침 전격 “철회” ▼

삼성 긴급 대책회의 막전막후


삼성의 새 채용제도를 둘러싸고 대학가와 인터넷에서 논란이 뜨겁던 27일 저녁. 최지성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부회장)은 인사팀과 홍보팀 등 유관 부서 팀장을 불러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총장추천제를 유지하되 인원을 할당하는 대신 대학별로 배출한 삼성 입사자의 0.5∼1%를 추천하게 하는 방안 △총장추천제는 폐지하고 서류전형만 유지하는 안 △총장추천제와 서류전형 모두 폐지하는 안이 논의됐다.

고심을 거듭했지만 의견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고 최 실장은 28일 아침 일찍 다시 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직접 전면 유보를 결정했다. 최 실장은 “개편의 취지가 사회적으로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면 아예 취소하는 게 낫다”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 사내 게시판에 올라온 임직원들의 반응이 부정적이었던 점도 유보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삼성 관계자는 “좋은 의도로 시도한 것인데 지역차별, 성차별 프레임이 적용될 줄은 몰랐다. 우리가 앞으로 어떤 개선안을 내놔도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긴 어렵다고 봤다”고 털어놨다.

삼성은 적어도 올해 하반기까지는 기존 제도를 유지할 것으로 전해졌다. 이인용 삼성 커뮤니케이션팀장(사장)은 “개편에 대한 고민은 계속하겠지만 언제까지 새로운 제도를 내놓겠다고 시한을 못 박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김지현 jhk85@donga.com·이세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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