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 간판은 내렸지만 대우정신은 경제계 곳곳에 살아”

정민지기자

입력 2017-03-23 03:00 수정 2017-03-2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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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창업 50주년 기념식

대우그룹의 역사 대우그룹은 ‘한국의 세계화’에 앞장서면서 경제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31세 때 창업한 대우실업㈜이 입주했던 서울 충무로 동남도서빌딩(1967년·□1), 북미 시장 수출을 위해 선적 대기 중인 대우자동차 르망(1980년대 후반·□2), 김 전 회장이 남포공단 합작 사업을 위해 방북했을 당시 모습(1992년·□3), 22일 서울 중구 밀레니엄 서울힐튼호텔에서 열린 대우그룹 창립 50주년 행사에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가운데)이 관계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4.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제공·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행사가 시작하기 한참 전부터 하나둘씩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머리가 희끗하거나 얼굴에 주름이 진 고령의 신사들이었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22일 서울 중구 밀레니엄서울힐튼호텔에서 열린 대우 창업 50주년 기념식.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된 지 18년이 돼 가지만 이날 모인 500여 명의 ‘대우맨’들은 사가(社歌)인 ‘대우가족의 노래’를 다같이 힘차게 열창했다. 일부 참석자들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룹은 한순간에 공중분해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대우맨들은 여전히 산업계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날 참석한 이태용 아주그룹 부회장(전 대우인터내셔널 사장)은 “20대 후반에 입사해 만 31년을 대우에 몸담으면서 수출 일선을 뛰어다녔다. 대우란 간판은 내렸지만 대우정신은 살아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우증권 부사장과 한국증권업협회 회장을 지낸 황건호 서강대 교수도 “금융업계에도 대우 출신들이 두루 포진해 있다. 그룹이 해체되며 당시 한국사회에 큰 고통을 안겼지만 대우맨들이 사명감을 갖고 그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해 나갔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우의 마지막 사장이었던 장병주 대우재단 이사장도 “우리 세대가 희생해야 후세가 잘살 수 있다는 일념 하나로 직원들이 해외시장을 개척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대우그룹은 1967년 김우중 전 회장이 31세에 자본금 500만 원으로 직원 5명을 데리고 서울 충무로에 문을 연 대우실업㈜이 모태다. 대우실업은 원단 수출로 무역업에 뛰어들었고 관련 기업들을 잇달아 인수합병하면서 회사의 규모를 키워나갔다. 대우는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지사를 세우는 등 수출시장의 최일선에서 활약했다. 1978년에는 새한자동차를 인수하며 자동차사업에 뛰어들었다.

1990년대 본격화된 대우의 ‘세계경영’ 기조는 당시에는 한국 경제의 희망 공식으로 여겨졌다. 1997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대우그룹을 개발도상국 출신 다국적기업 중 해외자산 규모 세계 1위로 발표했다. 1998년 대우그룹은 재계 서열 2위로 올라섰고, 대우그룹의 수출은 그해 한국 전체 수출액의 13%를 차지했다.

하지만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에서 김 전 회장이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며 갈등을 빚었고, 1999년 그룹이 유동성 위기에 빠지면서 그해 8월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다. 자동차 건설 중공업 전자 등 주요 계열사들은 다른 대기업에 팔려가며 공중분해 됐다. 그룹 해체로 국가 경제에 큰 부담을 줬다는 비판과 함께, 단기 유동성 위기에 빠졌을 뿐 부실기업이 아니었는데 금융 관료들이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날 대우그룹 50주년 행사에 참석한 김우중 전 회장은 “대우그룹 해체로 큰 아픔을 겪은 대우가족들에게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여 장내를 숙연하게 했다. 매년 행사를 주최하고 있는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2009년 대우그룹 임직원들이 설립한 비영리단체로 대우그룹 직원 출신 4500여 명이 정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해외 32개 지역에 지회를 두고 베트남,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에서 김 전 회장과 함께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GYBM) 교육을 하고 있다.

정민지 기자 jm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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