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의 전쟁터’가 된 최저임금위… 독립성 없는 ‘사회갈등 기구’

유성열 기자 , 조건희 기자

입력 2018-07-16 03:00 수정 2018-10-1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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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10.9% 인상 후폭풍]조정기능 상실… 새로운 시스템 필요



“을(乙)의 전쟁터가 돼버렸다.’

지난 몇 달간 내년도 최저임금(시급 8350원) 결정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극심해지자 최저임금위원회(최임위) 안팎에선 이런 말이 유행했다.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사회적 대화기구인 최임위가 조정과 타협 기능을 상실한 채 저임금 근로자와 소상공인의 싸움터가 돼버린 상황을 빗댄 표현이다.

여기에 정부, 정치권의 외압과 양대 노총 정규직 노조의 정치투쟁까지 맞물리면서 독립적 의사결정 기구를 표방한 최임위의 수명이 다했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특히 노사 간 극심한 갈등 속에 정부가 위촉한 공익위원 8명이 노동시장의 미래를 결정한 데 대한 비난 여론이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현재와 같은 최임위를 없애고 최저임금을 합리적으로 결정할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 싸움터로 전락한 최임위



1987년 고용노동부 소속 기관으로 출범한 최임위(최저임금은 1988년부터 시행)는 32년째 극심한 갈등을 반복하고 있다.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으면서 정권의 정책을 구현하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반대로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은 최임위를 정치투쟁의 장으로 활용해 왔다. 사회적 대화기구가 아니라 ‘사회적 갈등기구’가 돼버린 셈이다.

최저임금법에서 노사 대표와 공익위원 각 9명씩 모두 27명으로 최임위를 구성하도록 한 것은 노사가 서로 양보하고, 전문가들이 이를 중재해 합리적 수준에서 최저임금을 결정하라는 취지였다. 같은 방식을 운영 중인 독일과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은 이런 취지가 잘 구현되는 편이다.

하지만 한국은 공익위원을 고용부가 위촉하다 보니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이행하는 ‘거수기’ 역할에 그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고용 충격이 심각한 상황에서 공익위원들이 2년 연속 두 자릿수 인상률을 밀어붙인 것이 단적인 예다.

근로자위원 9명을 정규직 중심의 양대 노총이 추천하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정작 최저임금에 생존권이 걸린 비정규직과 저임금 근로자를 대표하는 위원은 2명뿐이다. 사용자위원 9명 중에서도 소상공인 대표는 2명에 불과하다. 저임금 근로자와 소상공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최저임금을 사실상 정부와 기득권 세력이 결정하는 셈이다. 박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임위의 모양은 협의의 장이지만 실제로 협의가 이뤄진 적이 거의 없다”며 “사실상 정부가 최저임금을 결정하면서 싸움만 붙여놓는 구조다. 최저임금과 무관한 대기업 노사 간 기(氣) 싸움 장으로 변질돼 버렸다”고 지적했다.


○ “금융통화위처럼 독립시켜야”

최저임금 협상이 매년 극심한 갈등을 일으키면서 이번 기회에 최저임금 결정 구조를 대폭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공익위원을 정부가 임명하고 대기업 노사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처럼 정치적 외압을 차단한 전문가 집단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정부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국회에서 여야가 동수로 전문가들을 추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금통위처럼 독립적, 중립적인 기관이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게 부작용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최임위가 제도 개선을 위해 만든 전문가 태스크포스(TF)는 ‘최저임금 구간설정위’와 ‘최저임금 결정위’로 최임위를 나누는 방안을 제시했다. 공익위원들이 최저임금의 상·하한선을 설정하면 그 안에서 노사가 협상을 통해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처럼 정부가 공익위원을 위촉하는 구조에서는 근본적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많다.

미국이나 뉴질랜드처럼 의회가 최저임금을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한국은 여야가 매년 극심한 대립을 반복하는 데다 국회의원들이 ‘표심’의 영향을 더 많이 받기 때문에 오히려 합리적 결정을 내리지 못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유성열 ryu@donga.com·조건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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