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기업 길들이는 칼로 이용되나

이은택 기자 , 박성민 기자

입력 2017-12-08 03:00:00 수정 2017-12-08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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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추진 논란

“국민연금이 KB금융 주주총회에서 노조 추천 사외이사 선임에 찬성했다는 뉴스를 본 순간 머리칼이 주뼛 섰습니다.”

“국민연금이 국민 돈이지 정부 돈입니까. 왜 정부 마음대로 의결권을 행사하나요.”

국민연금공단이 정부 방침에 따라 주주권 행사 조짐을 보이면서 재계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 기업들은 주주권 행사라는 원칙은 인정하지만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과정에서 정부 입김이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구조라고 보고 있다. 특히 현 정부가 진보진영과 노동계 여론을 등에 업고 전방위로 대기업을 압박하는 가운데 국민연금이 ‘정권의 칼’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퍼지고 있다.

국민연금은 언제라도 기업을 흔들 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기업성과 평가업체 CEO스코어와 함께 매출 기준 상위 30대 기업을 분석해 보니 국민연금은 평균 8.89%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반대하며 삼성을 벼랑 끝으로 몰았던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의 삼성물산 지분은 7.12%에 불과했다. 국민연금이 마음만 먹으면 기업의 경영권이나 지분을 둘러싼 쟁탈전에서 캐스팅 보트를 행사하거나 이사회 구성에 영향을 미치면서 특정 기업을 쥐고 흔들 수 있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정부가 국민연금과 같은 기관투자가의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를 유도하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추진하면서 뜨거운 논란이 벌어졌다. 지난해 5월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중소기업중앙회, 코스닥협회, 한국상장회사협의회 등과 함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위해서는 공개적인 의견 수렴 절차가 필요하다”며 신중한 도입을 주문했다. 전경련은 “2014년 이 제도를 도입한 일본 상장사들의 자기자본이익률(ROE·기업이 투입한 자본에 대한 수익의 비율)을 분석한 결과 변화가 없다”며 무용론을 주장했다. 반면 일본 기업들의 이익률이 늘고 실업률이 줄어드는 등 제도의 효과를 봤다는 주장도 나온다.

문제는 국민연금의 특성상 정부 입김에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문형표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로 1심과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아직 대법원 확정판결 전이지만 국민연금이 정권 입김에 얼마나 취약한지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제도팀장은 “국민연금이 연금가입자의 수익성 증대라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다른 의도를 가지고 주주권을 행사하려는 순간 ‘사실상 국유화’ 논란 등은 피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는 재벌개혁을 목적으로 제도를 도입하려는 분위기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스튜어드십 코드는 지속 가능한 재벌개혁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갑래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할 수 있다는 정부의 환상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국민연금은 공정거래위원회가 아니고 정의의 수호자도 아니다”라며 “연금 가입자의 충실한 자산 관리인이라는 본래의 취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공공부문이 관리하는 자산을 동원해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역량에 의문을 갖는 시선도 많다. 가장 큰 문제는 턱없이 부족한 인력이다. 기금운용본부의 연간 주식 의결권 행사는 약 3000건에 이른다. 하지만 이를 심도 있게 검토할 수 있는 조직은 사실상 운용전략실 산하 책임투자팀 소속 7명에 불과하다. 대개 주주총회 2주 전쯤 나오는 안건을 촉박한 시간 안에 분석해야 한다. 사안이 중대한 경우엔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등 외부 기관에 자문을 하지만 예산이 부족해 대다수 안건은 내부에서 분석할 수밖에 없다.

외부 자문을 거치는 것도 완전한 대안이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최근 KB금융의 노동이사 선임 건과 관련해 국내 의결권 자문기관인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국민연금에는 찬성을 권고한 반면 다른 기관 투자가들에게는 주주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노조의 이익에 치우칠 수 있다며 반대를 권고했다. 같은 사안을 두고 다른 의견을 낸 것은 주주의 이익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국민연금의 내부 의결권 행사 지침을 기계적으로 따랐기 때문이라는 게 기업지배구조원 측의 설명이다. 반면 글로벌 자문사인 ISS는 주주이익 침해 우려를 이유로 반대를 권고했으나 국민연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일본 연금적립금관리운용(GPIF)처럼 아예 외부 위탁운용사에 의결권 행사를 맡겨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본은 국내 주식투자를 모두 외부에 맡기고, 펀드 내 주식에 대한 의결권도 자산운용사가 행사한다. GPIF는 결과를 모니터링하는 등 관리만 맡는다. 여기엔 “직접 투자를 하는 운용사들이 기업에 대한 이해가 높다”는 철학이 깔려 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선 대기업 계열인 자산운용사들이 기업친화적인 의결권 행사를 할 수 있다는 우려의 시각이 있지만 반대로 국민연금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자산운용사들이 완전히 독립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견해도 적지 않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의결권 행사 권한을 분산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투자위원회의 의결권 행사 과정을 모두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

이은택 nabi@donga.com·박성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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