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마지막 정리… 온천서 하늘 보며 추억을 더듬다

오이타구마모토현(일본규슈)=조성하 기자

입력 2019-02-21 03:00 수정 2019-02-21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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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100m의 구주고원이 밤새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였다. 구주 온천의 홋쇼호텔 로텐부로는 이렇듯 이곳의 자연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멋진 곳이다.
나이를 먹으며 느끼는 것은 시간 흐름에 둔감해지는 것이다. 살아온 긴 세월도 이유 중 하나로 본다. 떠나보낸 시간이 많다는 건 회고하고 추억하며 후회하고 아쉬워할 게 많다는 것. 그러다보니 순간 스쳐 지나는 촌각에 대한 경계심도 무뎌져 그런 건 또 아닌지. 세월의 속도가 나이에 비례한다는 말도 게서 나온 듯하다. 50대엔 시속 50km, 60대엔 시속 60km….

하지만 그런 무던함도 나쁘지 않다. 빠름보단 느림이 좋고 그런 느긋함이 편안함으로 이어져서다. 여행길엔 특히나 그렇다. 느릿느릿 여기저기 둘러가는 노선버스를 보라. 거기 오르면 절대로 알 수 없었던 낯선 나라 현지인의 일상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이제껏 몰랐던 여행의 재미로 다가온다. 같은 버스라도 관광버스에선 절대 불가능한 희열이다.

나는 그런 버스여행을 규슈에서 주로 즐긴다. 산큐패스(SUNQ Pass)라는 편리한 탑승권 덕분이다. 이건 규슈 7개 현의 노선버스(고속버스 포함·커뮤니티버스 제외)에 통용되는데 간몬 해협 건너 혼슈 최남단 시모노세키(야마구치현) 여객선과 그곳 일부 노선에도 통한다. 방학 중인 2월엔 사은행사도 풍성하다. 그래서 그걸 활용하며 온천과 민슈쿠(民宿·민박집) 여행을 다녀왔다.


벳푸: 이 온천도시는 불이라도 난 듯 공중으로 높이 솟구치는 온천 수증기가 랜드마크인 일본 최대·최고 온천타운. 또 하나 든다면 다양한 지옥탕. 이건 벳푸 토종기업인 가메노이의 지옥탕 순환버스(3650엔)로 돌아봐야 제격. 그런데 산큐패스는 2월 한 달간 북부 규슈 3일권 소지자에게 이걸 무료로 제공 중이다. 전용 버스로 진행되는 2시간 반짜리 가이드투어(우리말, 영어)인데 선물(핫팩, 과자, 한글안내서 등)까지 준다.

최근 가메노이버스는 벳푸∼유후인∼히타 노선의 그랜드 투어를 신설했다. 덕분에 히타 방문객도 느는 추세. 그 히타를 산큐패스로 찾으면 현금권(300엔)과 야키소바(볶음메밀국수) 쿠폰(1000엔 상당)을 선물로 준다. 나는 그걸로 50년 역사의 대물림 야키소바식당 다이가쿠켄(大學軒)을 찾았다. 이 노포의 음식은 맛에서 관록이 느껴지고 낡은 그릇에서 격조가 느껴졌다. 허름해도 깔끔한 실내도 역시∼.

이 쿠폰 제목은 ‘소바 대결 무료식사권’. 히타(1000엔)와 시모노세키(1500엔)를 찾아 각기 다른 소바의 맛을 보라는 의도인데 액면가가 2500엔에 이른다. 아쉬운 건 기간이 2월 한 달뿐이란 것. 하지만 이런 이벤트는 수시로 열리니 산큐패스 블로그 ‘규슈타비’를 통해 정보를 확인하자.


야마가(山香) 온천:
벳푸만 북쪽 구니사키(東國) 반도. 오이타공항도 여기 있는데 온천 위치는 기쓰키시 외곽. 기쓰키는 해안 언덕에 요새처럼 지어진 작은 성의 도시. 기모노 차림이 잘 어울리는 곳으로 이름났다. 10여 년 전 기모노를 빌려 입고 사무라이저택마을을 관광하는 상품이 인기를 끈 게 그 배경. 지금도 건재한 기쓰키 성은 일본에서 규모가 가장 작다.

야마가 온천의 료칸 가제노사토(風の鄕)는 울창한 대나무숲 가장자리에 있다. 온천수(탄산수소염천)는 지하 1600m에서 38.7도로 용출 중.

구니사키 반도 북쪽의 분고타카다(豊後高田)는 영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2017년)의 무대. 여기서 촬영된 건 이곳 자체가 1960년대 모습 그대로여서다. 이곳에선 중심가를 ‘쇼와노마치(昭和の町·히로히토 일왕 재임기인 1926∼1989년 당시 모습의 거리)로 부른다. 거리 상점엔 전시된 물건마저 이 당시 것. 그래서 영화 세트장인지 실제 도시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다. 거대한 쌀 창고엔 당시 풍물을 쌓아두고 보여주는 박물관 전시장이 들었다. 영화 속 잡화점 건물도 사거리에 있다.

시라하나심포니의 물빛은 온천 부유물에서 온다.
야마카와(山川) 온천: 개천가 10여 호 작은 마을엔 목욕장 한두 곳에 료칸도 ‘시라하나(白花)심포니’ 한 곳뿐. 이 흥미로운 작명은 로텐부로에 몸을 담가 봐야 이해가 간다. 새하얀 부유물질(유노하나·湯花)이 물을 우유처럼 만들 정도로 풍부해선데 그게 ‘시라하나’(하얀 꽃)다. 유노하나와 시라하나의 차이는 그 양(量)에 있다. 이곳엔 그게 엄청나다. 수중의 피부를 하얗게 덮을 정도로.

이곳 여주인은 운수 대통의 사업가다. 25년 전 이 료칸 건축 때 지하공에서 온천수가 터지지 않아 걱정이 컸단다. 하지만 시공회사는 이렇게 깊이 파도 안 터지는 곳에서 온천수가 발견되면 그 수질이 특이한 경우가 많다며 기대를 부추겼다. 결과는 말 그대로. 산기슭에 기대어 설치한 로텐부로는 작지만 운치 만점. 빙하수의 옥빛을 닮은 뽀얀 온천수에 몸을 담그면 피어오른 시라하나가 피부를 덮는다. 그 상태로 있다 보면 절로 생기가 돈다. 다다미 객실엔 고타쓰를 두어 겨울밤 산중 료칸의 정취를 돋운다.


구주(九重) 온천: 아소산 분화구를 향해 오르는 산길의 해발 1100m 고원의 구주홋쇼(星生)호텔. 사방이 오로지 산과 갈대밭(아소구주 국립공원 지역)뿐인지라 이곳 로텐부로도 그런 풍경 속에 있다. 덕분에 이곳에서 온천욕은 그 자체로 지극한 호사가 된다. 훤히 개방된 로텐부로에서 하늘로 치솟은 산악과 푸른 하늘 흰 구름, 총총히 빛나는 별 감상까지 더해서다. 네 개나 되는 탕은 수질도 제각각. 그래서 즐거움도 네 배다. 그중엔 냉천도 있다.

여긴 규슈에서도 눈이 내리는 고원. 내가 묵던 밤에도 눈이 내려 이튿날 나는 처음으로 규슈에서 설국의 로텐부로 온천욕을 체험했다. 호텔에선 규슈자연보도(하이킹 길)가 숲을 통해 이어진다. 그날은 동백꽃과 나뭇잎이 눈에 덮인 진귀한 풍광이 펼쳐졌다. 호텔 앞길은 규슈 최고의 경관도로 야마나미 하이웨이(규슈현도 11호선·유후인∼아소). 구로카와 온천도 멀지 않다.


유노코(湯の現) 온천: 아소시에서 끝나는 야마나미 하이웨이는 분화구 외륜봉의 아소산 공원도로와 이어진다. 그리고 거길 달리다 보면 분화가 진행 중인 나카다케 아래 구사센리 초원을 지난다. 그런 뒤엔 남행 하산길로 규슈 횡단특급버스의 종착점인 구마모토시에 다다른다. 나는 거기서 가고시마로 남행해 미나마타항을 향했다. 목적지는 유노코 온천의 쇼요칸(昇陽館).

유노코 온천은 해넘이의 석양 풍광이 멋지기로 이름난 미나마타항 부둣가에 있다. 호텔과 료칸이 근 500m나 부두를 에워싼 형국이다. 하지만 정상 영업 중인 곳은 셀 정도. 상대적으로 취약한 접근성 때문이라는데 그럼에도 쇼요칸만은 건재하다. 멋진 경관의 로텐부로 덕분.

절벽가의 료칸은 그런 지형 덕을 톡톡히 봤다. 로텐부로가 모두 전망 좋은 절벽 위에 자리 잡아서다. 거기선 바다와 해안, 부두며 온천마을이 두루 조망된다. 2층 높이의 남탕이 그럴 정도라면 4층 높이의 여탕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로텐부로마다 실내욕장이 딸려 있고 바다는 정면 통유리창으로 보인다. 부두는 멋진 산책로다. 반대편 해안엔 작은 섬과 언덕이 있고 부두와 현수교 및 모래톱이 이어진다. 미나마타항의 걸출한 노을은 거기서 봐야 제격이다.

민슈쿠 사쿠라소의 아침식사 상이 차려진 식당. 여주인은 남편이 사냥한 사슴과 멧돼지로 요리를 낸다.
민슈쿠 사쿠라소(民宿 佐倉莊): 민슈쿠를 ‘민박’이라 부르지만 ‘사쿠라소’만은 ‘료칸형 민박’이라 불러야 한다. 음식만큼은 최고급 료칸급이어서다. 해발 570m 구중심처 깊은 산중의 이 숙소. 주변은 1200∼1500m 높이의 산이고 이 집이 들어선 곳은 V자 형태의 험준한 고카노쇼 협곡 산허리의 국도 445호선 가장자리. 이웃한 미사토정도 해발 1100m 고개 너머고 그 고갯길(국도 445호선)은 마주한 차량이 교행해 통과하는 외길이다.

그런 오지 산중인 만큼 이곳 객실은 간이침대에 담요의 소박한 6조 다다미방. 실내욕장은 히노키탕이지만 물은 온천수가 아니라 데운 지하수고 화장실도 공용. 하지만 식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프리미엄급 진수성찬이다. 직접 사냥한 사슴 다다키(말려서 겉만 익힌 살코기)와 탕수육, 멧돼지 삼겹살구이, 직접 담근 쓰케모노(야채절임), 참새구이, 된장절임죽순….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다. 말벌 튀김과 정말 부드러운 호박수프. 모두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맛있었는데 모두 드라마 ‘대장금’을 여섯 번이나 시청한 음식 달인 여주인장 솜씨다.

사쿠라소의 말벌 튀김.
이 산골 출신의 부부는 벌써 40년째 살며 여길 운영 중이다. 그런데 이곳은 깊은 산중인데도 곳곳에 동네가 있다. 12세기 헤이안시대(우리 고려시대)에 시모노세키의 간몬 해협에서 벌어진 단노우라 전쟁에서 패한 헤이케(平家)의 후예들이다. 몰살 위험에 처한 이들은 도주해 유후인에 은신했고 이후엔 이 산중의 산적 무리에게 의탁했다. 그게 여기 정착하게 된 사연인데 모두 다섯 성씨 가문이라 이곳 지명이 고카노쇼(五家莊)다. 고카노쇼 협곡은 가로지르는 다리 한중간에서 봐야 제격. 건너편 산중엔 낙차 38m의 우메노키(梅の木)토도로 폭포(일본 100대 폭포)가 있다.

● 여행정보



산큐패스: 규슈 7개 현 49개사의 노선버스(고속버스 포함)를 자유롭게 이용하는 승차권. 북부·남부 규슈 3일권, 전 규슈 3·4일권이 있다. 전국 여행사, 인터넷 쇼핑몰에서 살 수 있지만 가장 저렴한 곳은 ‘디스커버리규슈’. 추가 할인에 사은품 쿠폰 이벤트도 수시로 진행한다. 산큐패스를 이용한 규슈 노선버스 여행 요령은 전용 네이버 블로그 ‘규슈타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산큐패스 스쿨: 23일(토) 오전 11시 동아미디어센터(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1)에서 처음으로 열린다. 이 패스를 이용한 규슈 여행 요령과 필수 정보를 알려주는 이벤트. 무료. 사은품도 준다.


숙소: ◇오이타현 △가제노사토(야마가 온천): 기쓰키시 야마가정 구라나리 3003. △구주(九重)홋쇼호텔: 구스군 고코노에정 다노 230. ◇구마모토현 △시라하나심포니(야마카와 온천): 아소군 오구니정 기타자토 1346-1. △쇼요칸(유노코 온천): 미나마타시 유노코 4098-40. △사쿠라소(고카노쇼 협곡 민슈쿠): 야쓰시로시 이즈미정.

쇼와노마치: 1950, 60년대 모습이 간직된 오이타현 북부 해안 분고타카다 시내 및 당시 물건을 보여주는 전시관의 총칭.


오이타·구마모토현=조성하 기자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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