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역 대신 치료하는게 인간 존엄에 부합”… ‘아내 살해’ 치매 60대 항소심서 집행유예

김예지 기자

입력 2020-02-11 03:00 수정 2020-02-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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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첫 ‘치료사법’ 도입한 사례… 재판부, 직접 병원 찾아가 판결

10일 오전 법정이 아닌 경기도의 한 병원에서 중증 치매를 앓는 살인 혐의 피고인 A 씨(휠체어에 앉은 사람)에 대한 선고 공판이 열렸다. 이날 재판부는 A 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면서도 입원 치료를 계속 받을 수 있도록 집행을 5년간 유예했다. 김예지 기자 yeji@donga.com
“피고인, 최후 진술 듣도록 하겠습니다.”

서울고법 형사1부 재판장인 정준영 부장판사가 피고인 A 씨(68)를 향해 말했다. 마스크를 착용한 채 환자복 차림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던 A 씨는 정 부장판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뒤편에 앉아 있던 아들이 다가가 물었다. “아버지, 여기가 어디예요?” 그러자 A 씨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법원”이라고 했다. 하지만 A 씨가 휠체어에 앉은 채로 있던 곳은 병원이었다.

10일 오전 10시 30분, 경기도에 있는 한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의 빈 진료실이 법정으로 바뀌었다. 양복 차림으로 병원에 도착했던 3명의 판사는 챙겨온 법복으로 갈아입고 이 ‘간이 법정’에 들어섰다. 재판부를 사이에 두고 변호사와 검사가 마주 보고 앉았다.

치매 환자인 A 씨는 2018년 11월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하지만 A 씨는 자신의 범행을 기억하지 못했다. 딸이 구치소로 면회를 왔을 때 “엄마는 어디 있냐”고 물었을 정도로 중증치매를 앓고 있다. 1심 법원은 지난해 4월 A 씨에게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국내 법원 최초로 A 씨에게 ‘치료사법’을 시도해 지난해 9월 직권보석으로 A 씨를 석방했고, 그 후 A 씨는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치료사법’은 법원이 형벌로 피고인을 단죄하는 것을 넘어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A 씨를 위해 10일 법원이 아닌 병원에서 선고공판을 진행했다. 검찰 측은 “개인적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사건”이라면서도 “형사제도라는 것은 범행을 처벌하고 범죄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라며 1심 때와 같은 징역 12년을 구형했다. 재판부는 A 씨에게 1심보다 낮은 징역 3년을 선고하면서 징역형의 집행을 5년간 유예했다. 집행유예 기간엔 주거지를 치매전문병원으로 제한했고 치료와 보호관찰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재판부는 “(치매 환자를 위한 치료감호)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치료가 필요한 피고인을 교정시설에 두는 것은 현재나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해 정당하다는 평가를 받기 어렵다”며 “징역형의 실형보다 치료명령과 보호관찰을 붙인 집행유예형을 선고해 피고인이 계속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고 선언한 헌법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모든 사법절차가 오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치료적 사법절차는 앞으로 계속된다는 것을 명심해 달라고 피고인과 가족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김예지 기자 ye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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