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의료 현실 부담감에… 윤한덕 “혼자 휘날리는 태극기, 나 같아”

조건희 기자

입력 2020-01-24 03:00 수정 2020-01-24 03:00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1주기 맞아 ‘의사 윤한덕’ 평전 출간

고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이 2016년 6월 이동형 응급실 도입을 위해 유럽을 찾았을 때의 모습(왼쪽 사진). 생전에 남긴 자필 메모엔 응급의료체계를 걸머진 부담감을 혼자 삭이는 내용이 많았다. 김연욱 마이스터연구소장 제공
“직원들은 윤한덕이라는 ‘사명적’ 존재에 대해 기대한다. 그래서 (그것이) 내 본모습이 아니더라도, 내가 힘들더라도 노력해야 한다.”

지난해 2월 4일 설 연휴를 앞두고 의료 공백을 막기 위해 병원을 지키다가 과로사한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당시 51세)이 생전에 자신의 휴대전화에 남겼던 메모다. 윤 센터장이 이 메모를 쓴 건 2016년 3월 9일이었다. 2002년부터 맡아온 센터 직책을 내려놓겠다며 사직서를 냈다가 센터 직원들의 간곡한 만류로 마음을 고쳐 잡은 직후였다. 윤 센터장의 친구였던 허탁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57)는 “한덕이가 ‘지옥 같다’던 응급실의 현실을 고치기 위해 버거운 짐을 짊어지고 얼마나 외로워했을지 느껴진다”고 말했다.

윤 센터장의 이 자필 메모는 유가족과 동료들이 그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다른 일기와 편지, e메일 등과 함께 발견됐다. 김연욱 마이스터연구소장은 이를 종합한 평전 ‘의사 윤한덕’을 다음 달 초 그의 1주기를 맞아 출간할 예정이다.

취재팀이 받아본 출간 전 원고에선 전국 응급실의 아우성이 집중되는 중앙응급의료센터를 책임져야 했던 윤 센터장의 부담감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2014년 7월 허윤정 당시 아주대 의대 교수에게 보낸 e메일에 “나 같은 사람이 응급의료 최고 전문가 소리를 듣는 현실은 문제가 있다”라며 “가끔은 ‘혹시 내가 응급의료 발전의 걸림돌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을 못 이룬다”고 토로했다. 부인 민영주 씨(51)에겐 아파트에 걸린 태극기를 가리키며 “여보, 저거 보여? 혼자 계속 휘날리는 게 꼭 나를 닮은 것 같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부담감 때문에 윤 센터장은 3차례나 사직서를 냈지만 그때마다 동료들이 붙잡았다. 이국종 아주대병원 외상외과 교수는 “윤 센터장은 대체 불가능한 응급의료의 버팀목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평전 인터뷰에 응한 윤 센터장 지인 70여 명은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윤 센터장의 업적을 쏟아냈다.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환자가 처음 발생했을 때 그는 국립중앙의료원 메르스 대책반장을 맡았다. 당시 국립중앙의료원은 메르스 환자 67명을 진료했지만 추가 감염이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는데, 윤 센터장이 바이러스를 차단할 수 있는 음압 병실을 단 이틀 만에 만들어낸 덕이었다.

2014년 1월 국가응급환자진료정보망(NEDIS) 관리업체를 선정할 땐 윤 센터장이 ‘제대로 된 곳과 하겠다’며 입찰업체 3곳을 모두 탈락시켜 보건복지부와 조달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고 한다. 그렇게 고집을 부려 완성한 NEDIS는 그가 센터장을 맡기 전인 2001년 50.4%였던 ‘예방 가능 사망률’(환자가 적절한 치료를 받았다면 살 수 있었을 사망자의 비율)을 2017년 19.9%로 낮추는 밑거름이 됐다.

윤 센터장의 편지와 일기엔 부인 민 씨를 향한 사랑도 가득했다. 의대생이던 1988년 2월 14일 그는 일기에 “민영주라는 이름. 그 이름을 듣거나 말할 때, 나는 현기증이 나고 다리에 힘이 빠진다”라며 애타는 마음을 적었다. 이듬해 5월 2일 민 씨에게 보낸 편지엔 “영주가 숨 쉬는 대기, 나도 똑같이 호흡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줘”라며 구애했다. 두 사람은 1996년 결혼했다.

다음 달 4일 오후 2시 윤 센터장의 모교인 광주 동구 전남대 의대 대강당에선 허 교수를 비롯한 전남대병원 의료진이 윤 센터장의 1주기 추모 행사와 함께 평전 출판 기념회를 연다. 동아일보와 보건복지부, 국가보훈처, 대한의사협회 등이 행사 준비에 참여했다. 특히 의대 박물관엔 윤 센터장이 야근을 하다가 잠시 잠을 청하곤 했던 남루한 간이침대가 전시될 예정이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