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IT전문가, 공직서 맡은 일은 ‘PC 배급’

김준일 기자 , 홍수영 기자

입력 2020-01-02 03:00 수정 2020-01-0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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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100년을 준비합니다/2020 新목민심서-공직사회 뿌리부터 바꾸자]
민간역량 활용한다는 개방형 공직 “제대로 일해볼 기회 안줘 자괴감”


동아일보 DB

“민간 IT(정보기술) 경력이 20년인데… 막상 공직에 들어와 보니 나를 고장 난 컴퓨터 수리하는 사람으로 보더군요.” 지난해 초까지 한 정부 부처의 과장으로 정보화 업무를 담당했던 A 씨. 대기업과 벤처기업에서 20년 넘게 활약한 IT 솔루션 전문가다. 그런데 공직에 발을 들였던 지난 3년을 돌아보면 자괴감이 든다고 했다.

A 씨는 2016년 인사혁신처로부터 “정부에서 일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제안 받은 자리는 공직 가운데 민간에 열린 ‘개방형 직위’였다. 민간의 경쟁력을 활용해 공직사회의 전문성을 강화한다는 취지로 1999년 도입된 제도다.

인사혁신처 담당자는 당시 그에게 부처의 정보시스템을 총괄하고 정보화 역량을 키우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기업에서 조직의 전략과 문화를 IT로 구현하는 최고정보책임자(CIO)를 지냈던 터라 그런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민간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나라에 봉사한다는 기대감도 컸다.

하지만 실제 맡게 된 업무는 그의 예상과 많이 달랐다. A 씨의 부서는 그 부처에서 ‘PC 배급하는 부서’나 ‘PC 고장 나면 고쳐 주는 부서’로 인식돼 있었다. 제대로 일을 해보려고 여러 시도를 했지만 좌절의 연속이었다. 한 부서원은 아예 “여기는 새로 뭔가를 하는 부서가 아니다. 편안하게 지내다 가시라”고 귀띔했다.


▼ 장벽 친 공무원들 “뭔가를 하지말고 쉬다 가시라” ▼

20년 IT전문가의 좌절

민간 전문가를 공직사회 혁신에 활용하겠다는 개방형 직위 제도가 본래 취지와 달리 운영되고 있다. 동아일보 취재 결과 공무원 사회가 민간 출신 전문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가한 자리’에 잠시 머물다 가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각 부처는 민간 출신 전문가들에게 견고한 벽을 치고 핵심 요직을 내주지도 않는다.

이 때문에 ‘나랏일’에 대한 사명감으로 들어온 민간 전문가 중 적지 않은 수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공직사회를 조기에 떠난다. 2015년 7월 도입된 정부헤드헌팅과 국민추천제를 통해 공무원이 된 민간 인재 중 최초 임용 기간(3년)이 만료된 인물은 26명. 본보 조사 결과 이들 중 절반 이상인 14명이 3년이 되기 전에 공직을 떠났거나 3년 계약을 채운 뒤 재계약을 포기했다.

현실적인 한계도 있다. 공무원에게 주는 임금으로는 민간의 일류 인재를 데리고 오기도, 붙잡고 있기도 쉽지 않다. 일부 민간 전문가는 개방형 공직을 이력서에 추가할 수 있는 경력 정도로 여기기도 한다.

이근면 전 인사혁신처장은 “공직사회가 60년 이상 바뀌지 않는 것은 기득권 때문”이라며 “공직은 전리품이 아닌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하는 자리로, 시대 변화와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흐름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김준일 jikim@donga.com·홍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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