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익성 빨간불 항공산업… “뭉쳐야 산다” 구조조정 거센 바람[인사이드&인사이트]

변종국 산업1부 기자

입력 2019-12-27 03:00 수정 2019-12-27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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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항공, 이스타 인수로 본 실태

변종국 산업1부 기자
항공산업이 출범한 이래 최근만큼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시기는 없었다. 이달 18일 저비용항공사(LCC) 제주항공은 이스타항공의 지분 51.17%를 인수한다고 밝혔다. 아시아나항공은 HDC현대산업개발에 매각 절차를 진행 중이다. 한 항공사 대표는 “올 것이 왔다. 언젠간 항공업계가 마주쳐야만 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항공업계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됐다는 의미다.

항공업계에선 이미 이런 예견이 많았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은 지난달 미국 뉴욕에서 “대한민국에 아직 항공사가 9개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구조조정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로 본다. 황용식 세종대 교수도 최근 “9개 항공사가 경쟁 중인 한국도 구조조정의 시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 침체와 여행수요 둔화 등 악재가 계속되면 적자를 버티지 못한 항공사들이 시장에서 퇴출될 것이라는 의미다.


○ 덩치를 키워야 살아남는다

제주항공이 이스타항공을 인수하기로 한 것은 ‘덩치를 키우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데 양사 경영진이 인식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이번 협상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현실을 냉정하게 봐야 한다. 항공사들끼리 자존심 내세우고 가격 경쟁을 하면서 치고받고 싸울 때가 아니다. 손을 잡고서 한 푼이라도 더 아끼고 벌려고 하지 않으면 다 죽는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고 말했다.

두 회사가 이번 합병을 통해 기대하는 것은 공동 경영에 따른 각종 비용 절감이다. 현재 제주항공은 국내선 6개와 국제선 82개 노선을, 이스타항공은 국내선 5개와 국제선 34개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 이 중 비인기 및 중복 노선의 경우 공동 운항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천∼도쿄 노선을 공동 운항할 경우 제주항공을 예매한 고객의 숫자가 적으면 이스타의 같은 노선을 오가는 항공기를 타는 식이다. 당연히 수익성이 높아질 수 있다.

항공기 대수 증가에 따른 비용 절감 효과도 있다. 현재 제주항공은 45대, 이스타항공은 23대의 항공기를 운용하고 있다. 합치면 68대가 되는데 항공기 보유 대수가 많은 항공사들엔 유류나 항공기 리스 계약 등을 할 때 금전적인 혜택이 주어진다. 금융권에서 신용이 높거나 거래가 많은 고객들에게 금리 우대 및 수수료 인하 등의 혜택을 주는 것과 비슷하다.


○ 잘나가던 항공업계에 닥친 위기

사실 항공업계 위기는 올해 초부터 감지됐다. 국내 항공사들이 모두 2분기(4∼6월) 영업이익 적자를 냈고 3분기에도 대한항공을 제외하고는 적자 기조를 유지하는 상태다. 여기에 경제 침체와 일본 제품 불매운동, 홍콩 자유화 시위가 이어졌다. 항공업계 입장에서 이는 수요 하락을 의미했다.

항공기 이용객의 절대치가 준 것은 아니다. 올해 상반기(1∼6월) 항공기 이용객은 6156만 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문제는 항공사들이 최근 몇 년간 호황 추세에 매년 항공기 보유 대수를 늘렸는데, 비행기를 늘린 만큼의 여행 수요가 늘지 않는 데서 발생했다. 공급 과잉이 온 것이다.

실제 국민들은 여행비 지출을 줄이는 추세다. 9월 한국은행이 발표한 소비자동향지수(CSI)의 소비지출전망에서 여행비 지출전망지수는 87로 조사됐다. 2013년 12월(87)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11월 여행비 지출전망지수는 90으로 소폭 상승했지만 2017년 여행비 지출전망지수(99)에 비하면 여전히 미약한 수준이다. CSI 소비지출전망은 기준치인 100을 밑돌수록 지갑을 닫겠다는 의미다.

업계에선 이 같은 수요 공급 간 괴리가 내년에도 지속된다면 한두 곳의 항공사가 또 구조조정의 희생양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게다가 정부는 올해 3월 신규 LCC 3곳에 항공운송면허를 발급했다. 안 그래도 공급 과잉으로 수익성 악화를 겪고 있는 업계에 경쟁자 3명이 더 들어온 것이다.

한 항공사 임원은 “당분간은 그동안 벌어 놓은 돈과 긴축 경영으로 어떻게든 버티겠지만 불황이 계속되면 몇몇 항공사는 버티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방민진 유진투자증권 연구원도 “공급 과잉 속에 여행 수요가 못 따라오면서 업계 성장에 정체가 온 이상 시장 재편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 “이번에 항공사 살까” 관심 갖는 대기업들

항공사 인수에 관심을 갖고 있는 국내 대기업도 적지 않다. 인수합병(M&A)의 큰 장이 설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스타항공과 인수 및 투자를 논의한 대기업이 10곳이 넘는다. 이 중에는 CJ와 신세계도 있었다고 한다. 인수 조건과 해당 기업 내부 사정 등으로 거래가 성사되진 않았지만 이들은 “항공업에 관심이 많다”는 의사를 지속적으로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항공업계에서는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기로 한 HDC현대산업개발이 에어부산과 에어서울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관심사다. 에어서울은 항공기가 7대 정도고 노선도 10여 개에 불과하다. 출범 이후 흑자를 기록한 해가 없다. 에어부산도 부산지역 기반만으로는 확장성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HDC 측이 두 회사를 내놓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반대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아시아나항공의 경쟁사인 대한항공이 LCC인 진에어를 가지고 있고, 국내선 및 단거리 노선의 경우 LCC가 경쟁력이 있어 오히려 더욱 내실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업계에선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한 HDC컨소시엄에 참여한 기업이 에어부산이나 에어서울을 떠안을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컨소시엄 참가 기업인 현대백화점이 에어부산 등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안다”며 “범현대가로 분류되는 곳에서 에어부산 또는 에어서울을 운영하면 KDB산업은행이 아시아나항공 분리 매각은 없다고 말한 취지와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 항공사 고위 관계자는 “항공업계는 호황의 시기를 거친 뒤 위기가 오고, 다시 호황이 오는 주기가 있다”며 “항공업계의 봄날을 기대하고서 항공업 진출을 타진하는 기업이 많다”고 말했다. 업계가 어려워질수록 항공사 가치는 떨어질 것이고 이런 상황을 일부 기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 혹독한 구조조정 거친 미국과 유럽 항공업계

항공업계의 경기 사이클 특성 탓에 미국과 유럽 항공업계도 일찌감치 구조조정을 겪었다. 미국은 1980년대 이후 항공업계에 있던 진입장벽 및 가격제한 정책 등을 허물었고 신규 항공사가 대거 생겼다. 1970, 80년대에만 100여 개의 신규 항공사가 생겼을 정도다. 이후 항공사들의 가격 경쟁이 가속화됐고 여객 수요는 한정적인데 공급이 넘치는 상황을 버티지 못한 항공사들이 줄도산했다. 당시 미국 항공업계를 주름잡던 팬암과 이스턴항공도 1991년 파산했다.

2000년대엔 미국의 정보기술(IT) 버블 붕괴와 9·11테러 등이 겹치면서 항공사들이 급격한 실적 악화를 겪었고 본격적인 산업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2005년 아메리칸항공과 US항공이 합병했고 2008년 미국 델타항공이 노스웨스트항공과 웨스턴에어라인을 인수했다. 2010년엔 유나이티드항공이 콘티넨털항공과 합병했다. 현재 미국의 항공업계는 아메리칸항공, 델타항공, 유나이티드항공이라는 대형 항공사와 사우스웨스트항공 등 LCC가 공존하며 10여 개가 경쟁을 벌이는 구조로 재편된 상태다.

유럽도 2003년 프랑스의 에어프랑스와 네덜란드의 KLM이 합병했고 독일 루프트한자와 오스트리아항공도 손을 잡았다. 현재 유럽은 크게 루프트한자그룹(루프트한자, 스위스항공, 오스트리아항공 등), IAG그룹(영국항공, 이베리아항공 등), 에어프랑스-KLM 그룹 등으로 재편된 상태다.

미국과 유럽 항공업계는 여전히 구조조정 중이다. 최근 에어베를린, 토머스쿡, 와우에어 등이 자금 부족으로 영업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류제현 미래에셋 연구원은 최근 낸 보고서에서 “유럽 항공사의 승객당 수익은 2015년 10달러 안팎에서 올해 5달러 미만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북미 항공사들의 승객당 수익도 2015년 25달러에서 올해는 15달러 안팎으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며 “전 세계적으로 수요 둔화와 수익성 악화로 구조조정이 촉발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항공업계 전문가들은 한국도 구조조정을 겁내지 말고 다양한 형태의 협력 모델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허희영 항공대 경영학부 교수는 “항공사들끼리 합쳐서 다양한 협력 모델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글로벌 추세”라며 “앞으로 LCC 간 합병과 제휴, 공동 협력, 동맹, 외항사들과의 협력 등 다양한 사업 모델이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업계의 구조조정 과정에 지나치게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 항공업계 임원은 “항공사 간 손을 잡거나 합병을 하면 슬롯(특정 시간에 공항을 이용할 권리)이나 운수권을 주고받거나 공동 활용하려 할 텐데, 이를 관리하는 국토교통부가 개입하기보다는 항공사들에 자율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업계의 구조조정 및 사업 재편은 생존을 위한 과정인 만큼 규제의 대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변종국 산업1부 기자 bj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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