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D 첫 패소 “한국 정부 안이했다”…‘兆 단위’ 론스타·엘리엇 ‘비상’

뉴스1

입력 2019-12-23 13:44 수정 2019-12-23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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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등과의 조단위 ‘투자자-국가 간 분쟁(ISD)’ 판결을 앞두고 한국 정부가 이란 다야니 가문과의 ISD에서 최종 패소하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특히 한국 정부가 이미 패소한 논리로 판결취소 청구 소송에 나서는 등 안이한 자제로 일관하면서 이번에 패소했다며 정부의 소송 전략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론스타 ISD에 패소하면 배상금액이 최대 5조원으로 추정되며 엘리엇의 경우 최대 1조원으로 전망된다.

ISD는 투자한 나라의 정부 잘못으로 피해를 본 기업이 제기하는 국제 소송이다. 지금까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ISD에서 결과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韓정부 ‘대우일렉 ISD 첫 패소’ 확정…이란 다야니에 730억 배상
23일 금융위원회는 “지난 20일 영국 고등법원이 이란 다야니(Dayyani) 가문 대(對) 대한민국 사건의 중재판정 취소소송에서 한국 정부의 취소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계약 보증금과 보증금 반환 지연 이자 등 약 730억원을 지급하게 됐다”고 밝혔다.

유엔 산하 국제상거래법위원회 중재 판정부는 지난 2010년 진행된 대우일렉 매각 과정에서 한국 채권단의 잘못이 있었다며 이란의 가전업체 소유주 ‘다야니’ 가문에 계약 보증금과 보증금 반환 지연 이자 등 약 730억원을 지급하라고 지난해 6월 판결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이의를 제기하며 지난해 7월 중재지인 영국 고등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냈으나 지난해 6월 판결이 최종 확정된 것이다. 한국 정부의 ISD 첫 패소 사례다.

대우일렉 사건은 2010년 4월 다야니가가 싱가포르에 세운 D&A를 통해 대우일렉을 매수하려다 실패하면서 불거졌다. 다야니 측은 채권단에 계약금 578억원을 지급했으나 채권단은 ‘투자확약서(LOC) 불충분(총 필요자금 대비 1545억원 부족한 LOC 제출)’을 이유로 계약을 해지했다.

다야니는 당시 계약 보증금 578억원을 돌려 달라고 했으나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등 대우일렉 채권단이 거절했다. 이에 2015년 다야니는 보증금과 보증금 이자 등 935억원을 반환하라고 한국 정부를 대상으로 ISD를 제기했다. 이때 ‘한-이란 투자보장 협정’를 근거로 들며 우리나라 정부를 압박했다.

◇정부 ISD 대응 안일했나…론스타 5조·엘리엇 1조 소송 우려 확산
이번 ISD 최종 패소를 두고 한국 정부의 소송 전략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 정부는 ISD가 성립할 수 없다는 논리로 이번 소송에 대응했다. 채권단과 다야니 가문의 법적 분쟁일 뿐 정부가 관여한 게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채권단인 캠코는 국가기관이 아닌 공공기관이라는 논리였다. 동시에 다야니 가문이 D&A라는 싱가포르 특수목적회사를 통해 투자한 만큼 한-이란 투자보장 협정에 해당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유엔 중재재판부는 캠코를 국가기관으로 볼 수 있다며 한국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영국 고등법원에서 같은 논리를 펼쳤고 재차 쓴맛을 보게 됐다.

이에 따라 ISD 본게임인 론스타와 엘리엣 판결을 앞두고 한국 정부의 국제소송 대응 능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현재 각 ISD 사건에 대해선 법무부를 중심으로 국무조정실과 기획재정부, 외교부, 산업통상자원부, 금융위 등이 대응 방안을 논의 중이지만 전담 과는 없는 상태다. 정부가 ISD 전담과를 법무부 내에 설치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흐지부지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안별로 대응이 이뤄지다보니 노하우를 축적하기 어렵고 ISD 특성에 맞는 대응이 어려운 상황이다. 금융위가 론스타 ISD 등에 대응할 목적으로 지난 7월 금융분쟁대응 태스크포스(TF)를 설치했으나 법률 전문가 없이 전담인력 1명만 두고 있는 실정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 정부의 대응이 국제상공회의소(ICC) 산하 중재재판소에서 론스타를 상대로 전부 승소한 민간 금융사 하나금융지주보다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외환은행을 인수한 하나금융지주는 과거 외환은행 최대주주였던 론스타가 지난 2016년 8월 제기한 14억430만달러(약 1조6700억원) 규모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전부 승소한 바 있다.

앞서 론스타는 지난 2016년 8월 “하나금융이 협상 과정에서 외환은행 매각가격을 낮추지 않으면 한국 정부가 매각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점을 문제삼아 ICC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손해배상금과 이자 및 원천징수금액을 포함해 청구금액을 14억430만달러(약 1조6100억원)로 조정했다.

론스타는 지난 2012년 외환은행 지분 51.02%를 하나금융에 매각했다. 매각 금액은 당초 계약보다 약 7732억원이 낮은 3조 9100억원이었다. 국제중재재판소는 하나금융이 계약에서 요구한 바에 따라 최선의 노력을 했으며 론스타와 충분히 협력·협의하였으므로 계약 위반 사항이 없다고 봤다.

론스타는 지난 2012년 11월 한국 정부를 상대로 ‘외환은행 지분 매각 과정에서 심사를 부당하게 지연했고 국세청의 차별적 관세로 부당하게 세금을 내 손해를 입었다’고 ISD를 제기했다. 론스타는 외환위기 직후 어려움을 겪던 외환은행을 지난 2003년 1조4000억원에 인수한 뒤 HSBC에 팔아 넘기려 했지만 한국 정부가 승인을 미뤄 무산됐고 이 과정에서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지난 7년간 진행된 론스타와의 ISD는 당초 올해 9~10월 최종 결론이 날 것으로 예견됐으나 재판부의 고민이 길어지면서 최종 판결은 내년으로 미뤄진 상황이다.

한국 정부는 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으로부터 삼성물산 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1조원에 가까운 ISD 제소를 당했다.

◇전문가들 “투자자보호 개념 넓게 본 이번 판결 경계해야”
전문가들은 이번 ISD 패소가 남은 ISD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영국 고법이 이번 판결을 통해 ‘투자자 보호’ 개념을 넓게 보는 경향성이 확인돼 남은 론스타와 엘리엇 또한 비슷한 논리로 전개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점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판결이 ‘투자’와 ‘투자자’의 개념을 넓게 보고 한·이란 투자보장협정(BIT)에 명시된 FET(공정하고 공평한 대우 원칙·Fair and Equitable Treatment)를 위반한 것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동안 다야니가의 중재 신청이 한국 정부가 아닌 대우일렉 채권단과의 분쟁이라고 주장해왔지만 영국 고등법원은 다야니가를 ‘대한민국’에 투자한 ‘투자자’로 해석했다.

론스타도 한·미 FTA 내 FET 위반을 주장하고 있어 이번 판결로 확인된 ‘확장 해석 경향’이 이어질 우려를 배제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송기호 국제통상전문 변호사는 “대우일렉의 FET 쟁점은 론스타와 엘리엇의 경우에서도 같으며, 투자와 투자자 개념을 상당히 넓게 본다는 것이 이번에 확인이 된 것”이라며 “물론 다른 사안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부분을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관료의 힘이 센 한국은 서구 관점에서 봤을 때 정부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일률적으로 본 것이 이번 판결”이라면서 “국가간 맺은 투자협정과 FTA 상에 ‘정부 조치’라는 것의 정의와 기준을 넣어야 무조건적으로 ISD에 휘말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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