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단절됐던 소녀, 주례 서달라고 왔을때 가슴 뭉클”

김현수 기자

입력 2019-12-20 03:00 수정 2019-12-2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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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청소년들 보듬는 청소년행복재단의 특별한 연말

이중명 청소년행복재단 이사장(아난티 회장·76·왼쪽)이 김지희 씨(25·가명) 부부의 결혼식 앨범을 열어보고 있다. 김 씨는 어렵던 10대 시절부터 의지해온 이 회장을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김 씨는 “행복재단을 통해 내가 어릴 때 느꼈던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의 언니가, 가족이 되어 주고 싶다”고 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떨리는 손으로 거울을 들고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봤어요. 왜 살았을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너는 평생 사랑받지 못할 사람’이라던 엄마의 모진 말이 생각났고, 그게 진짜일까 봐 겁이 났어요.”

소녀티를 벗지 못한 젊은 엄마는 그날을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19일 서울 서초구 청소년행복재단에서 만난 김지희 씨(25·가명)는 대부분 덤덤히 이야기했지만 어떤 대목에선 감정이 격해졌다.

김 씨의 엄마는 스무 살에 낳은 딸에게 악에 받친 말을 퍼붓곤 했다. “너는 평생 불행해질 거다.” “너는 평생 사랑하지도, 사랑받지도 못할 애다.” 학교를 보내지 않으려는 엄마 때문에 결석도 다반사였다. 중학교 2학년 때 이웃의 신고로 아동학대가 인정됐고 엄마와 결별했다. 이후 김 씨는 청소년보호시설을 전전하며 친구들과 무리지어 수리 중인 빈집이나 아파트 옥상, 지하에서 생활했다.

17세에 잘못된 선택을 했다. 버티는 게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친한 동생과 여관방을 찾았고 이불에 불을 붙였다. 불은 순식간에 번졌고 소녀들은 눈앞에 닥친 죽음에 허둥대다 정신을 잃었다. 큰 화재로 번지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깨어 보니 남은 건 얼굴을 포함해 전신의 28%에 3도 화상을 입은 몸이었다.

김 씨는 2011년 방화 미수범으로 소년원에 갔다. 시설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살았다. 안 그래도 단절된 세상에서 더 움츠러들었다. 그때였다. 법무부 공익법인인 한국소년보호협회의 당시 회장 이중명 아난티그룹 회장(76)이 네 차례의 흉터 수술비용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1년 뒤 출소한 김 씨를 호텔 리조트 그룹인 아난티 계열사 골프장에 취직까지 시켰다.

살면서 타인의 호의라곤 받아본 적이 없던 소녀는 의심부터 들었다. ‘왜 나를 도와줄까.’ 취업한 지 한 달여 만에 도망쳤다. “그땐 내가 소중한 사람이란 걸 몰랐어요.”

2014년부터 소년보호협회 이사장을 맡게 된 이 회장은 김 씨를 수소문했다. 결국 김 씨는 2016년부터 소년보호협회에서 일했다. 비슷한 처지의 청소년을 보며 그는 할 일을 직감했다. 김 씨는 남편을 만났고 지금은 23개월 된 아들도 있다.

김 씨는 얼마 전 이 회장에게 편지를 썼다. “할아버지를 만나고부터 하고 싶은 게 생긴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에 피라미드같이 생긴 표가 나온다. 한 명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람이 두 명을 도와주는 식으로, 온정은 퍼져 나가는 것이다. 나도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해보고 싶다.”

이 회장은 지난달 청소년행복재단을 출범시켰고 이사장을 맡았다. 더 적극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청소년들의 실질적 자립을 돕기 위해서다. 김 씨를 비롯해 그간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 이날 재단을 찾은 것도 관련된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이 재단은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육, 장학, 주거 지원 등에 나선다.

이 회장은 “나도 어렵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겪었다. 대학등록금을 버느라 성적은 늘 낙제점이었다. 평생 이렇게 힘들게 살 것 같아 죽으러 산에 올라갔던 적도 있다. 내 눈에 보이는 어려운 아이들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했다. 이 회장은 아난티 남해호텔 인근 남해해성고등학교 이사장이기도 하다. 폐교 위기에 처한 학교를 살리기 위해 2006년 선뜻 맡았다.

이날 청소년행복재단에는 또 다른 김지희들이 있었다. 김민석 씨(25)는 성악가를 목표로 음대 입학 준비를 하고 있다. 이 회장은 김 씨에게 레슨비를 지원했다. 김 씨는 “여덟 살에 처음 가출했다. 가족이 때려 멍투성이였다. 늘 외로웠지만 아무도 없었다. 또래 집단에서 관심받으려고 힘을 과시했고 발을 빼기도 쉽지 않았다. 내겐 그저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고 했다. 이들은 입을 모았다. “나 같은 아이들 몇 명을 맡아 언니, 오빠가 되어 주면 아이들은 자연스레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장점을 살리게 될 것이다. 가족이 되어 주고 싶다.”

이 회장도 “지희가 주례를 서달라고 했을 때, 민석이가 노래를 열심히 부를 때 보람을 느낀다”며 “앞으로도 재단을 통해 많은 아이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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