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1980년대가 말을 걸어온다

김민 기자

입력 2019-11-11 03:00 수정 2019-11-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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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미술관 ‘시점·시점’전
미술작품 330점-자료 1000점 통해 30여 년전 소집단 미술운동 재조명
탄탄한 연구와 자료수집 뒷받침… 시대를 증언하는 예술의 힘 드러내
미술동인 두렁의 걸개그림 ‘백미’


1985년 여성주의 작가로 구성된 ‘시월모임’의 창립전에 참가한 윤석남 작가의 작품 ‘봄은 오는가’. 창립전에는 김인순, 김진숙도 참여했다. 경기도미술관 제공
1984년 서울 경인미술관에서 열린 ‘두렁’ 창립전을 35년 만에 재현한 공간. 경기도미술관 제공
예술 작품은 단순한 장식품을 넘어 시대를 증언하는 가치를 지닌다. 국내에서는 자주 느끼기 어려웠던 이 같은 예술의 가치를 제대로 보여주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경기 안산시 경기도미술관에서 지난달 29일 개막한 ‘시점(時點)·시점(視點)―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전이다.

개막 간담회에서 안미희 경기도미술관장은 “학예팀의 역량을 총동원한 프로젝트로 경기지역 근현대미술사의 새로운 시점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새롭게 여는 전시에 보내는 의례적 수사로 들릴 수도 있지만, 탄탄한 연구와 자료수집으로 뒷받침된 전시를 보고 나면 ‘근거 있는 자신감’의 원천을 느낄 수 있다.

‘시점·시점’전은 1980년대 한국 사회 변화의 한 축을 이끈 경기지역의 소집단 미술운동을 재조명하는 전시다. 1980년대 주요한 미술작품 330여 점과 자료 1000여 점을 30여 년 만에 공개한다. 전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현실과 발언’ ‘임술년’ 등 미술그룹과 달리 현장 중심이어서 작품이 보존될 수 없었던 미술 그룹에 집중했다.

전시는 1980년대 뜨거웠던 경기도 미술의 현장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처럼 느껴진다. 백미는 1984년 4월 서울 경인미술관에서 열렸던 ‘두렁’ 창립전을 재현한 공간이다. 당시 미술동인 두렁은 고려 불화인 ‘감로탱’을 재해석한 걸개그림을 걸고 미술관 마당에서 열림굿을 펼쳤다. 김종길 학예실장은 “걸개그림은 1980년대 우리 미술이 탄생시킨 독자적인 형식”이라며 “갤러리가 아닌 현장 중심인 데다 그룹 활동에 의해 제작돼 제대로 보존될 수 없었던 작품을 30여 년 만에 복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걸개그림의 변천사도 확인할 수 있다. ‘두렁’처럼 초기의 걸개그림에서는 한국 전통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독창적인 시각 언어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1988년 제작된 ‘가는 패’의 걸개그림 ‘노동자’는 러시아에서 시작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각 언어를 차용했다. 당시 집회에 사용됐던 이 그림은, 민중미술이 현장 예술에서 시작해 프로파간다로 전락해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밖에 여성주의 미술가 그룹인 ‘시월모임’, 아방가르드 미술 그룹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 ‘목판모임 나무’ 등 30여 개 소집단의 미술 활동 자료를 만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전시의 배경에 독일 카셀의 국제미술전 ‘도쿠멘타’가 있다는 것이다. 도쿠멘타는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와 함께 언급되는 세계적인 국제 미술전으로 5년에 한 번 열린다. 1955년 첫 전시에서 독일 나치 정권하에 퇴폐미술로 금지됐던 모더니즘 예술을 선보였다. 이후 현대미술의 거장 요제프 보이스가 ‘사회 조각’을 선보이는 등 삶과 맞닿은 예술을 보여주며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김 학예실장은 이러한 ‘시대 증언’의 속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재작년 카셀을 방문해 도쿠멘타 실무진과 함께 아카이빙 방법을 연구했다. 그는 경기 미술 아카이브 구축을 장기적 과제로 진행할 예정이다.

“때로 긴 이야기보다 이미지 한 컷이 우리 삶을 더 정확히 보여줍니다. 역사의 상징적 기록으로 미술의 아카이브가 중요한 이유죠.”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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