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 공소남닷컴] 15년 연인 뒤로하고 이역만리 떠난 준이치, 그가 감춘 진실은?
양형모 기자
입력 2019-10-18 05:45 수정 2019-10-18 05:45
준이치 역을 맡은 김규종(왼쪽)이 마리코(강지혜 분)를 향해 격한 감정을 쏟아내고 있다. 마주보고 있지만 극 중에서 두 사람은 이역만리 떨어져 있는 상황이다. 사진제공|벨라뮤즈
■ 일본 동명소설 원작 연극 ‘왕복서간’
두 연인의 편지로 이야기 진행
일본 작품 특유의 잔잔한 감성
순수남 김규종·당찬녀 강지혜
명품 연기에 은은한 여운 가득
남자가 느닷없이(그러니까 상의 한 번 없이) “남태평양 오지 섬에 2년 정도 나갔다 올게”한다면 여자는 당연히 “우리 헤어지자는 거야?”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연극 ‘왕복서간 :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은 이렇게 시작된다. 남자는 준이치, 여자는 마리코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중학교 동창이자 오래된 연인이다. 이렇게 남태평양으로 떠난 준이치와 일본에 남은 마리코는 긴(많이 길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해, 그리고 15년 전 사건의 진실 안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왕복서간’에 수록된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이 이 연극의 원작이다. 일본 작품 특유의 감성과 정서가 (예상했던 대로) 잔잔하게 물결친다. 심지어 반전조차 잔잔해 전체적으로 쇼팽의 녹턴을 피아노 연주로 듣는 느낌이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는 피아노 음악이 중요한 배경으로 사용된다.
준이치와 마리코는 기나긴 독백형 대사(편지내용이다)를 삼국지 게임처럼 턴제로 연기한다. 연기를 떠나 ‘저 긴 대사 외우기 참 힘들었겠다’ 싶어지는데, 과연 배우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다.
‘왕복서간’에서는 숫자 ‘0’이 매우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남태평양 현지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준이치는 작은 칠판에 몇 번이고 ‘5×0=0’을 썼다 지우며 의미를 새긴다. 어떤 수를 곱해도 ‘없음’을 만들어버리는 ‘0’. 준이치는 15년 전의 사건에 ‘0’을 곱해버리고 싶었던 것일까. 이후 준이치는 ‘5×0=0’ 대신 ‘5×0=5’를 휘갈겨 쓰고는 크게 좌절하고 만다. 이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인데, 준이치가 신경질적으로 휘갈긴 ‘5 0 5’는 마치 그의 내면이 외치는 ‘S O S’처럼 읽혔다.
사진제공|벨라뮤즈
이 작품은 열린 결말까지는 아니지만, 완벽하고 명쾌한 답변을 관객에게 내어주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이렇다.
준이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마리코를 떠나 2년이란 긴 시간 동안 남태평양으로 떠나야만 했을까. 마리코는 왜 결국 준이치 옆에 남지 않았을까.
준이치를 맡은 김규종(SS501)은 순수한 백색의 준이치를 보여 주었다. 거짓말을 거짓말처럼 해야 하는 준이치의 연기가 잘 보였다. 가끔은 ‘여기선 조금 더 강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부분도 없지는 않았지만.
마리코 역의 강지혜는 대사 전달이 또렷해 관람을 즐겁게 해주었다. 편지지를 내가 들고 읽는 기분이 들 정도다. 강하고 당찬 마리코를 충분히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현재의 두 사람과 15년 전(둘은 열네 살이었다)의 두 사람을 엇갈리고 다시 마주하게 만드는 미장센이 참 아름다웠다. 종종 볼 수 있는 방식이지만 이 무대에서는 더없이 은은했다.
‘한 여자를 지켜보고, 보호하기 위해 15년을 바친 한 남자의 이야기’. 연극 ‘왕복서간 :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은 11월 4일까지 서울 삼성동 KT&G 상상마당 대치아트홀에서 공연한다. 김다현, 에녹, 김규종, 이정화, 강지혜 등 출연.
그나저나 세상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거짓말, 나는 할 수 있을까.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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