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반상배]대한민국産인삼의 자부심

반상배 한국인삼협회 회장

입력 2019-09-11 03:00 수정 2019-09-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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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45년. 영의정 홍봉한은 상소를 올려 상인들이 울릉도에서 인삼을 몰래 채취하니 왜인들이 알면 외교 분쟁이 일어날까 걱정된다고 보고했다. 독도를 우리 땅이라고 명시한 최초의 문헌 ‘동국문헌비고’가 편찬됐던 계기가 다름 아닌 ‘인삼’이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고려인삼의 인기가 엄청 높아서 조선과 단교가 되더라도 인삼을 확보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시 왜인들과 울릉도를 놓고 영토 분쟁이 발생할까 우려해 미리 특산물을 문서로 정리, 외교적 분쟁에 대비했고 그 결과 1695년 안용복의 독도 점유와 왜인 추방 일화도 소개될 수 있었다.

일본이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품목의 한국 수출을 규제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한국 경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보니 국가의 경제적 피해를 우려한 국민들이 자발적인 불매운동에 나서는 실정이다. 그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일본 제품을 대체할 국내산 브랜드를 소개하는 사이트인데 기업에 투자된 자본의 국적, 제품의 생산지역 및 생산인력의 구조, 로열티 지급 여부 등 꽤 구체적인 정보들을 명시해두고 있었다.

물산이 풍부하지 않았던 조선시대부터 거의 모든 재화와 서비스가 국경을 넘나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삼은 한국의 대표 상품이었다. 우리의 인삼 상인들은 거침없이 세계를 누볐고, 민간 사절단 역할을 하며 세계로 뻗어가는 데 선각자 역할을 했다. 단순 경제 규모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 속에 켜켜이 스며있는 사실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그것들을 널리 알리는 것이 본인의 사명이라 생각한다.

그 첫 번째는 한국의 영문 국호이다. 인삼은 실크로드를 통해 서양에 ‘고려인삼’으로 소개된 후 그 효능과 상품 가치를 알아본 아라비아, 페르시아, 중국 등의 상인들이 고려시대 무역의 중심지 개성 벽란도에 모여들면서 ‘COREA’로 불리게 됐다. 인삼 덕분에 세계에 고려가 알려지게 된 셈이다.

두 번째는 생산기술이다. 인삼은 지금도 전문 인삼 농사꾼이 아니면 재배하기 어렵다. 한국은 인삼 재배에 유리한 위도에 위치하며 적합한 토질과 기후를 갖추고 있기도 했지만 경작 기술과 가공 기술 역시 최고 수준을 갖추고 있다. 1000년을 이어온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유산 덕분에 우리가 여전히 인삼 종주국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대한민국의 독립자금이다. 일제강점기 상하이로 이주한 한인들은 인삼 상점을 차리거나 인삼 행상에 나섰다. 홍커우공원(현 루쉰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졌던 윤봉길, 의열단 박열 등은 인삼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독립자금을 조달했다. 인삼 행상은 수익이 컸으며 의심받지 않고 이동이 용이해 정보 수집에도 유리했던 까닭이다.

중국, 캐나다, 미국 등의 저가 물량 공세에 밀려 고려인삼이 고전하고 있다고 하나, 대한민국의 역사를 관통하며 인삼에 새겨진 한국인의 자부심은 대체 불가능한 고려인삼의 상품 경쟁력으로 계승되고 있다.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인삼 종주국으로서의 긍지를 드높일 수 있도록 더 많이 연구하고 혁신할 것을 약속드린다.

반상배 한국인삼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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