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대의 연극은 삶을 뒤바꿀만한 진실함 담아야”

김기윤 기자

입력 2019-09-02 03:00 수정 2019-09-0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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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 대상 연출가 정진수 민중극단 대표

정진수 연출은 후배 연출자 및 제작자들에 대해서도 간단한 평가를 내렸다. 정 연출은 “박근형 연출 작품은 눈에 띌 정도로 탁월하고,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도 정말 기획력이 좋다”고 말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지금 젊은 시절로 돌아가 연출하라고 하면 연극 말고 영화 연출했을 거야.(웃음) 요즘 영화관이나 넷플릭스에 재밌는 작품이 얼마나 많은지. 그 수준도 연극 못지않아요.”

백발이 성성한 노(老)신사, 국내 연극연출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정진수 연출(75)의 입에서 “영화가 더 좋은 것 같다”는 말이 나오자 주변 사람 모두 의아한 듯 그를 쳐다봤다. 평생 희곡 대본 수십 편과 씨름하며 연출을 해 온 그의 말엔 연극이 더 진일보해야 한다는 자기반성과 염원을 담고 있었다. 그는 “연극이 살아남으려면 영화나 넷플릭스 이상으로 삶을 뒤바꿀 만한 경험과 ‘인생에 결코 거짓말하지 않는’ 진실함을 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중극단을 이끌며 50년 이상 연극계에 헌신한 정 연출을 지난달 22일 서울 종로구 한국연극인복지재단에서 만났다. 그는 올해 극 연출가로는 유일하게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 사업’ 대상자로 선정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관으로 예술가의 일생, 작품 활동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후대 예술인을 위한 기록과 경험을 남기는 게 사업 취지다.

두 달간 5번 진행한 인터뷰에서 정 연출은 이날 “시원하지 뭐. 연극계에 전할 나의 짐을 벗어던진 것 같다”며 구술채록에 참여한 소회를 밝혔다.

그는 민중극단을 이끌며 ‘아가씨와 건달들’ 등 70여 편을 연출 또는 번역했다. 또 성균관대 영문학과 교수 재직 당시 연기예술학과 창설을 주도했다. 그는 “연극, 영상을 위한 전공을 만든 시기는 내 인생에도 중대한 변곡점”이라고 했다.

꾸준한 극단 활동 외에도 윤호진 연출, 윤석화 배우와 제작사 ‘에이콤’을 1993년 공동 설립했다. 에이콤은 현재 뮤지컬 ‘명성황후’ ‘영웅’ 등을 무대에 올리는 대형 제작사. 그는 “능력보다는 이것저것 끼어들다 보니 쉼 없이 많은 작업을 한 것 같다”며 “가끔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것도 있다”고 말하고는 겸연쩍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털어놓는 에피소드에는 상상치 못한 인물도 튀어나왔다. 수녀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넌센스’ 초연 당시 그는 다짜고짜 고(故) 김수환 추기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극을 제작한 조민 대표를 도우려고 김 추기경께 전화해 공연을 보러 오시라고 했어요. 근데 정말 오셨더라고요. ‘공연이 좋다’고 격려하셨는데 그 순간은 평생 잊히지 않아요. 김 추기경 추모 영상에 당시 옆자리에 앉은 저도 나옵니다.(웃음)”

2008년 교수직 퇴임 후 그는 암으로 큰 수술을 치렀다. 회복 후엔 현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전에 제작한 ‘이병철, 정주영, 박정희’를 다룬 역사기록극의 연장선상에서 1987년 민주화운동부터 소련 붕괴 등 한반도의 격변기를 다룬 극을 내년에 올리고 싶다고 했다.

“1910년 국권을 상실했으나 이후 7년 사이에 태어난 이병철 정주영 박정희가 대한민국 근현대의 기틀을 닦았죠. 이후 한국은 고도 경제성장과 함께 1987년 민주화, 공산권 붕괴 등을 겪으며 다양한 군상의 인물이 생겨났죠. 이들의 삶을 통해 현대사를 조명하는 것이 극작품으로 흥미롭고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 대본의 틀을 잡고 제작 준비 중입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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