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저, 푼저, 냉파, 출첵… 생존을 위한 서민의 분투[광화문에서/유재동]

유재동 경제부 차장

입력 2019-08-28 03:00 수정 2019-08-28 10:13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유재동 경제부 차장
‘강저(강제 저축) 1일차입니다. 소소하게 하루 1000원씩이지만 달려봅니다.’

‘30분 만에 번개같이 볼일 보고 버스 환승 할인받았습니다. 1250원 아껴서 푼저(푼돈 저금) 성공!’

요즘 재테크 관련 온라인 카페에는 서민들의 눈물나는 절약 수기가 넘쳐 난다. 하루 1000원씩 6개월 아껴 적금 20만 원을 탔다며 뿌듯해하고, 운동 앱을 이용해 몇 달을 열심히 걸어 커피 한 잔 값을 마련했다는 정도는 예사다. 식비와 전기료,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봉투 값을 아낀다며 냉파(냉장고 파먹기)로 남은 식재료를 해치우거나, 쇼핑몰 앱에 매일 출첵(출석 체크)해 공짜 포인트를 꾸준히 모으기도 한다. 이런 게시물에 댓글이 이어지며 모르는 이들끼리 서로 조언과 격려를 주고받는 모습도 연출된다.

서점에도 절약과 저축을 다룬 책들이 유독 많이 보인다. 통신사와 카드사 혜택 챙기는 것은 기본이고 영화를 ‘문화가 있는 날’에만 보며 관람료 할인을 받는 법, 각종 경품 이벤트의 당첨 확률을 높이는 법을 가르쳐주는 책도 있다. 지하철을 자주 탄다면 한 달 정기권을 사야 훨씬 유리하다거나, 회사에 도시락을 싸갖고 다니며 점심 값을 아끼라는 조언도 한다.

이런 현상은 15∼20년 전 벤처 버블로 ‘부자 되기’ 열풍이 불었을 때와는 큰 차이가 있다. 당시 일반인들 사이에 ‘자산 10억 만들기’ 붐이 일었고,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카피가 인기를 끌었다. 이때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저축만 하면 가난해지고, 투자를 해야 부자가 된다’고 역설하며 펀드의 대중화를 일으켰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돈에 대한 목표치가 그때보다 훨씬 낮아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젠 10억 원은커녕 종잣돈으로 1억 원, 심지어 1000만 원을 마련하는 것도 다들 버거워한다. 어떤 재테크 책은 “1억 원을 예금하면 매달 이자가 15만 원 나온다. 하지만 우린 아무리 노력해도 1억 원을 모을 수 없으니 다달이 15만 원씩 아끼며 1억 원을 번 효과라도 얻자”고 제안한다.

재산 증식의 희망이 점점 줄어들다 보니 사람들은 어쩌다 생기는 작은 기회에도 구름같이 몰린다. 최근 한 인터넷은행에서 내놓은 금리 5% 예금은 순식간에 100만 명이 몰려들며 출시 1초 만에 완판이 됐다. 오프라인 점포에서도 특판 예금 가입을 위해 새벽부터 긴 줄을 서는 풍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런 상품에 가입해 얻을 수 있는 추가 금리 혜택은 한 달에 몇천 원, 많아야 1만∼2만 원 선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이득이라도 얻기 위해 몇 날 며칠 정보를 찾고, 발품을 팔며, 실낱같은 가능성에 기대를 건다. 이처럼 사람들이 부(富)나 성공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재테크 소시민’으로 만족하며 사는 것은 더 큰 불황의 징조라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남들처럼 부자가 되긴 이미 글렀으니 작은 돈이라도 성실하게 모아 생활비라도 건지겠다는 세태가 우리 마음을 짠하게 한다. 비록 용이 되진 못했지만, 개천의 가재나 붕어로라도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의지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어루만지기는커녕 자꾸 후벼 파는 용들이 우리 주변에 많은 것 같아 더욱 안타깝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