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화제작 ‘레인 룸’… 미술 불모지 부산 흠뻑 적시다

부산=김민기자

입력 2019-08-16 03:00 수정 2019-08-1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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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체 부산 미술계 부는 새바람

《영국 런던을 기반으로 한 예술가 그룹 ‘랜덤 인터내셔널’의 작품 ‘레인 룸’이 15일 부산 사하구 부산현대미술관(MoCA)에서 선보였다.
2012년 런던 바비컨센터에서 처음 공개한 ‘레인 룸’은 전시장 속에 비가 내리지만, 관객이 지나가면 비를 맞지 않는 설치 작품이다.
영국 전시 첫날 1000명 이상이 몰리고,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중국 상하이 유즈미술관 등을 순회하며 세계적 관심을 받았다.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 전시 마지막 날엔 관람 대기 시간만 8시간에 이르렀다고 한다.》

흥미로운 건 ‘레인 룸’처럼 올해 하반기 가장 많은 기대를 모은 전시 중 하나가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열린다는 점이다. 일반인에게 부산은 ‘미술’이라 했을 때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도시는 아니었다. 심지어 부산 출신인 작가 A 씨도 “제주도는 관광객이 미술관을 찾지만, 지금까지 부산은 불모지에 가까웠다”고 했다. 그런데 그 ‘불모지’인 부산에서 미술의 에너지가 꿈틀대고 있다.


○ 개관 두 달 만에 28만 찾은 MoCA

랜덤 인터내셔널의 전시 ‘아웃 오브 컨트롤’에선 설치작품 ‘레인 룸’과 영상 작품 ‘Swarm Study’를 선보인다. ‘레인 룸’은 기술 특성상 한 번에 12명만 관람할 수 있어 10분 단위로 예매를 받는다. 전시 첫날 960명분의 티켓이 매진됐다.

지난해 개관한 부산현대미술관은 문을 열기 전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부산시립미술관, 벡스코를 비롯해 미술관이나 갤러리가 밀집한 동부가 아닌 서부 을숙도에 위치해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또 완공 뒤에도 밋밋한 외관 때문에 “대형마트처럼 보인다”는 비판이 나왔다.

국제갤러리는 지난해 첫 지역 분점을 부산의 전시공간 F1963에 개관했다. 북유럽 기반 예술가 그룹 ‘수퍼플렉스’의 개인전이 10월 27일까지 열린다.국제갤러리 제공
하지만 독립 기획자 김성연 씨(55)가 2017년 관장으로 취임하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개관전에서 파트리크 블랑의 ‘수직정원’으로 외관을 장식하고,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 토비아스 레베르거의 ‘토비아스 플레이스’를 설치해 미술관을 산뜻하게 바꿨다. 스위스 작가 치문의 ‘사운드 미니멀리즘’ 등 쉽고 유쾌한 작품 위주로 전시를 구성해 개관 두 달 만에 관객 28만 명이 몰렸다. 서울시립미술관의 ‘데이비드 호크니’전이 넉 달 동안 35만 명이 찾은 것을 비교하면, 지방에서 ‘대박’을 터뜨린 셈이다.

홍경한 미술평론가는 “기획자가 전문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선을 타는’ 것이 무척 어려운데 그 접점을 잘 찾았기에 관객이 반응했다”며 “제도권 밖에서 ‘야전사령관’처럼 전시를 지휘한 관장의 경험이 잘 녹아들었다”고 말했다.

부산 경남 지역사회가 그만큼 미술 분야에 대한 갈증이 컸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14일 부산 해운대에 개관한 미디어 전문 미술관 ‘뮤지엄 다’도 문을 연 지 이틀 만에 관객 2000명이 찾았다.


‘미광화랑’은 지역성을 주제로 한 기획 전시로 20년을 버틴 독특한 공간이다. 부산 한국화단을 이끈 청초 이석우 회고전이 19일까지 열린다. 미광화랑 제공
○ 지역 미술 생태계의 회복이 주요 과제

사실 부산 미술계는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갤러리와 대안공간이 적지 않았다. 국내 대표적인 중견 작가 중에도 부산 출신이 많다. 30대까지 부산에서 활동한 안창홍 작가(63)는 “당시만 해도 미술 잡지나 화보 등이 부산을 거쳐 서울로 올라갔다”며 “유명한 평론가들도 부산에 와서 서적을 구입하는 등 지역 미술계가 활발했다”고 회상했다. 그 덕분에 부산만의 강렬하고 직설적인 시각 언어를 특징으로 하는 미술 경향도 생겨났다. 미광화랑의 김기봉 대표도 “6·25전쟁 때 타 지역 사람들을 품었던 부산은 다양성이 살아있는 도시”라며 “서울과 교류하지 않는 특유의 고집이 있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 고유한 화풍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전후로 국내 미술계가 침체되면서 부산 지역의 미술 생태계도 축소됐다. 부산에 ‘큰손’ 컬렉터는 많지만, 대부분 서울 갤러리에서 작품을 구입하는 실정이다. 그 때문에 부산의 잘 갖춰진 인프라와 시스템은 새로운 미술 거점으로 가능성이 충분하지만 콘텐츠를 채우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산 출신인 정복수 작가(62)는 “제도나 교육도 중요하지만 좋은 작가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며 “지역을 기반으로 독창적인 작가가 나와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했다.

부산=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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