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Case Study]김치찜-A4전단으로 실리콘밸리 뚫었다

고승연 기자

입력 2019-07-10 03:00 수정 2019-07-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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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 마이크로소프트의 임직원 5만 명이 가입한 서비스이자 아마존 직원 4만 명이 활용하는 애플리케이션(앱). 또 다른 글로벌 IT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직원들이 그 서비스를 많이 써서 신경 쓰인다’고 자주 언급하는 앱. 이 얘기를 듣고도 어떤 앱인지, 무슨 서비스인지 떠오르지 않는다면 질문을 바꿔보자.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두산인프라코어 ‘신입사원 명퇴’,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 회장 관련 ‘미투’,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갑질’이 최초로 알려지게 만든 앱. 바로 직장인 익명 소통 커뮤니티 서비스 ‘블라인드’다. 블라인드는 회사 e메일 인증으로 재직 사실을 확인하고 가입할 수 있는 모바일 익명 커뮤니티로 한국에서는 300인 이상 사업장 직원의 가입률이 무려 51%에 이른다.

LG그룹, 삼성그룹, 롯데그룹에서 각각 10만, 9만, 6만 명의 직원이 가입해 있고 국내 3000개 이상 기업에서 일하는 200만 명 넘는 직장인이 이 앱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블라인드는 흔히 생각하듯 국내에서만 유명한 앱이 아니다. 2013년 한국에서 론칭한 후 1년여 뒤 진출한 미국에서도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다. 창업한 지 6년, 앱을 론칭한 지 5년여 만에 글로벌 플랫폼 회사이자 커뮤니케이션 서비스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는 회사 팀블라인드의 미국 시장 진출 성공 요인을 DBR(동아비즈니스리뷰)가 집중 분석했다.


○ “미국에선 안 될 것”이란 편견에 도전


팀블라인드는 한국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창업한 회사이지만 본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다. 2013년 말 한국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후 2014년 초 곧바로 미국에 본사법인을 만들었다. 처음부터 미국이나 일본 등 해외에서 승부를 낸다는 게 창업자 문성욱 대표의 전략이었다. 직장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비즈니스이기에, 한국은 시장이 작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변에선 모두가 말렸다.

일단 미국에서는 직장 내에서도 터놓고 솔직하게 문제점을 말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있기에 익명 소통 커뮤니티가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조언이 이어졌다. 하지만 문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실리콘밸리 IT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해 ‘취재’를 해보니 미국 기업의 소통문화는 회사 이미지 제고와 마케팅 차원에서 과장된 측면이 있었다.

더 중요한 사실도 알게 됐는데, 그나마 과감하게 내부 문제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은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있는 사람들, 최소한 비자에 문제가 없어서 당장 회사를 나가도 미국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뿐이라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문 대표는 ‘직장인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똑같다.

아무리 수평적이고 소통하는 문화가 있더라도 결국 상당수는 불만이 있고 이를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처럼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에는 필요 없는 서비스’라는 선입견은 문 대표가 스스로 다양한 시장 조사와 취재를 통해 깼고 초기 유저가 확보된 이후 아마존을 시작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우버, 페이스북 직원들이 블라인드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 김치찜을 끓이고 전단지를 붙이다


미국에서 처음부터 가입자가 폭발하고 비즈니스가 성공한 건 아니었다. 실리콘밸리 기업에서 일하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만나 앱을 홍보하고 서비스를 알렸지만 그들은 굳이 ‘홍보대사’가 돼 주지 않았다. 2015년 상반기를 지나면서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렀다. 이때쯤 마지막으로 페이스북 광고를 활용했다. “우리는 회사별 채널에서 익명으로 소통하는 커뮤니티 플랫폼 서비스다. 이런 걸 잘 쓸 수 있는 회사가 있을까?”라는 질문을 타기팅 광고 형식으로 던졌는데, 의외로 아마존 직원들로부터 반응이 왔다. 아마존의 조직문화가 다소 ‘빡세고 경직돼 있다’는 걸 곧 알게 됐다. 아마존이 희망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단 시애틀로 거처와 사무실을 옮기고 지인의 지인을 모두 동원해 한국인 직원들부터 찾았다.

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에 자리를 잡고 사무실을 사랑방으로 만들어 향수에 젖은 직원들에게 김치갈비찜 등 한국 음식을 제공했다. ‘외국 나와서 고생하는 한국인’이라는 동병상련에 아마존 한국인 직원들이 적극 도와줬다. 그러자 아마존 직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바로 근처에 있는 또 다른 글로벌 기업 마이크로소프트 공략에 나섰다. 역시나 한국인 직원들을 중심으로 도움을 요청하면서 공개된 장소가 많은 마이크로소프트 캠퍼스 내에 앱을 소개하는 전단지를 붙이고 다녔다. 다소 무모한 이 ‘미친 짓’을 보고 마이크로소프트 직원들이 호기심에 앱을 찾기 시작했다. 와 보니 늘 궁금했던 아마존 직원들이 가입해 있었고 마이크로소프트 직원들은 커뮤니티 내 ‘라운지’에서 이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아마존 직원과 마이크로소프트 직원 다수가 모여 익명으로 소통하는 곳’이라는 소문이 나자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다양한 IT 회사 직원들도 블라인드를 찾았다. 시애틀에서 문 대표와 직원들이 지겹도록 끓여댄 김치찜, A4 용지에 홍보문구를 적어 전봇대에 붙이고 다니던 그 정성이 첨단 비즈니스 종사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셈이다. 이러한 미국 진출 전략이 통했던 덕에 현재 미국 내 1000여 개 기업에서 약 50만 명의 직원이 블라인드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문 대표는 “앞으로 블라인드를 활발한 커리어 개발 및 이직 플랫폼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라며 “궁극적으로는 커리어 전환과 자기계발 학습 플랫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승연 기자 seank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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