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를 향해 들이댄 글과 이미지의 칼날… 아시아 첫 ‘바버라 크루거’전

김민 기자

입력 2019-07-03 03:00 수정 2019-07-0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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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를 통해 ‘주체’의 의미 탐구
‘당신의 몸이 전쟁터다’ ‘LOSER’ 등 1980년대부터 작업한 44점 전시


바버라 크루거가 1996년 영국 잡지와 협업한 설치 작품 ‘무제(데이즈드 앤드 컨퓨즈드를 위한 프로젝트)’. 사진 속 인물들의 냉소적 발언을 크루거의 트레이드마크인 붉은 상자 속 흰 글씨로 써넣었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화면을 가득 채운 여자의 얼굴 한가운데. 새빨간 박스 속 흰 글자가 집회에서 구호를 외치듯 강렬하게 새겨졌다.

‘당신의/몸이/전쟁터다(Your body/is a/battleground)’.

미국 예술가 바버라 크루거(74)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1989년 미 워싱턴에서 낙태 합법화를 주장하며 열린 ‘여성 행진’ 집회를 위해 만든 포스터다. 당시 크루거는 집회 주최 측을 돕고 싶다고 연락했지만 ‘이미 홍보대행사가 있다’는 답을 듣고 스스로 포스터를 제작해 늦은 새벽 거리 곳곳에 붙였다. 이 포스터는 이후 페미니즘의 고전적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크루거의 아시아 첫 개인전 ‘BARBARA KRUGER: FOREVER’가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린다. 전시회는 미술관 측이 오픈 1주년을 맞아 유명 페미니즘 작가 섭외에 적극 나서 성사됐다. 전시는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작업 44점을 선보인다.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작품 대다수는 시사 잡지 표지나 헤드라인에서 볼 수 있는 강한 볼드체의 글씨와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병치한 것들이다. 크루거는 뉴욕 파슨스 디자인스쿨을 다니다 10년 동안 잡지사 ‘콩데 나스트’의 디자이너로 일했다. 이때의 경험을 그녀의 평생 작업에 활용했다.

1989년 미국 워싱턴의 낙태 합법화 집회를 위해 만든 포스터 ‘당신의 몸이 전쟁터다’. 위키미디어커먼즈·Wwiktoria
크루거는 매일 아침 출근길 가판대에서 소비자를 유혹하는 잡지 표지를 보며 ‘사진과 문구가 진실과 거짓을 교묘히 결정하는 파워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기존 이미지가 자본을 끌어들이거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된다면, 크루거는 그 반대를 향해 이미지의 칼날을 들이댄다. ‘당신의 몸이 전쟁터다’ 역시 1990년 미술관의 커미션으로 대형 광고판(빌보드)에 전시됐을 때, 곧바로 낙태 반대 모임에서 8주 된 태아의 그림을 넣은 광고판을 세우며 ‘이미지 전쟁’을 촉발했다.

크루거의 작품에서 ‘나’와 ‘너’ 등의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독일 철학자 발터 베냐민, 프랑스 평론가 롤랑 바르트 등에게 받은 영향이다.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을 통해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미와 견해가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줬듯, 크루거는 문구를 통해 ‘주체’의 의미를 탐구한다.

“전업 예술가가 되기에는 너무 가난해 늘 일을 해야 했다”는 그는 자신의 작품이 대중에게도 쉽게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어를 쓰지 않는 국가에서 작품을 선보일 땐 그 나라의 언어를 사용했다. 이번 전시에도 두 작품, ‘무제(충분하면 만족하라)’, ‘무제(제발웃어제발울어)’를 한글로 제작했다.

특히 ‘제발웃어제발울어’는 작가가 해당 전시실을 보다가 “‘please laugh please cry’라고 쓰고 싶다”며 제작했다고 한다. 또 미국에서 작업한 ‘충분하면 만족하라’는 아직 컴퓨터 디자인 프로그램을 활용하지 못하는 작가가 연필, 지우개, 자를 활용해 도안을 직접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전시장 말미의 아카이브 룸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얼굴에 ‘LOSER’라는 문구를 새기는 등 직설적 표현이 돋보이는 최근의 잡지 표지들도 만나볼 수 있다. 전시는 12월 29일까지. 7000∼1만3000원.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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