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 6·25전쟁으로 초토화된 한반도… 부상자 치료하며 의료기술 발달했어요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

입력 2019-06-26 03:00 수정 2019-06-26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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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미 공군이 운용한 B-29기는 대당 최고 9000kg의 폭탄을 싣고 9000km까지 이동하며 폭격을 수행할 수 있었다. 전쟁 중에는 의학 체계도 크게 발전했다. 창비 제공
6·25전쟁은 우리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전쟁입니다. 전쟁의 상처가 너무 깊고,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과서, 영화, 다큐멘터리, 문학 작품 등을 통해 6·25전쟁의 실상에 대해 배웠습니다. 오늘은 6·25전쟁을 보다 더 다양하게 이해하기 위해 미 공군의 공중 폭격과 의료 기술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 미 공군의 북한 ‘초토화 작전’


많은 사람들은 전쟁 초기 북한군이 일방적으로 우세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북한군이 전쟁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낙동강까지 진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북한군은 결정적으로 공군과 해군의 전투력이 거의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육군에만 의존하는 전투를 벌였습니다.

미 공군의 B-29 전투기들은 1950년 7월 초부터 북한군의 전투력에 기여하는 산업시설과 군수공장, 유류저장소, 도로, 철도, 항만시설, 북한군의 공군 기지 등을 폭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북한 내 주요 군사 및 산업시설들이 파괴됐습니다. 특히 미 공군은 주요 공업 도시였던 원산과 흥남, 청진 등을 타깃으로 ‘초토화 작전’을 개시해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또 북한군이 남한으로 이동하는 통로에도 집중 폭격을 가해 이동을 어렵게 했습니다.

1950년 7월 20일경 김일성은 전쟁이 ‘파국적 상황’에 이르렀다며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고, 북한군 지휘자들을 강하게 질책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군은 미 공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밤에 주로 이동하고, 낮에는 산속으로 행군하며 낙동강 전선에 도착했습니다. 낙동강 전선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는 동안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했고, 큰 피해를 입은 북한군은 후퇴했습니다.

1950년 10월 중공군이 참전한 이후 미 공군은 북한의 군사시설뿐 아니라 도시와 농촌 지역 전체를 공격 목표로 삼았습니다. 도시와 농촌의 주택과 시설들이 중공군과 인민군의 은신처로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전에 파괴한 것입니다.

특히 소이탄(여러 가지 시설을 불태우기 위해 만든 폭탄)을 투하해 민간인 거주 지역을 초토화했고, 이로 인해 주요 도시의 약 90%가 완전히 파괴됐습니다. 휴전협정이 진행되는 2년 동안 북한의 전쟁 수행 의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저수지를 폭격하고, 여러 지역의 공격 목표물을 순차적으로 돌아가며 폭격을 가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도시에 남아 있는 건물이 거의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남한 지역의 민간인들도 폭격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미 공군 비행기들은 일본 기지를 출발해 한반도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비행 거리가 멀고 연료가 부족해 한반도 상공에서 짧은 시간 작전을 수행하고 일본 기지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특히 전쟁 초기 북한군이 낙동강 지역으로 이동할 때에는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어려웠습니다. 미 공군기들이 북한군을 공격 목표로 삼았지만 불행하게도 남한 측 민간인들도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매시(MASH)의 역할과 의료 기술의 발전


1952년 제35육군병원에서 수술하는 모습. 서울대 병원 의학 박물관 제공
6·25전쟁에서는 전선의 이동이 많았습니다. 38선에서 시작된 전쟁이 낙동강 유역까지 내려갔다가 압록강 전선까지 올라갔습니다. 여름에는 영상 30도까지 올라갔고, 겨울에는 영하 30도까지 내려갔습니다. 유엔군과 국군은 먼저 날씨와 싸워야 했습니다. 각종 전염병과 동상 환자가 속출했습니다.

전투 과정에서는 총상과 화상을 입은 환자가 많이 발생했습니다. 현대 전쟁에서는 병원이 아주 중요한 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병원은 전투 중 발생한 부상자를 신속히 치료해 다시 전투에 투입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군인의 사기와 심리적 안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에 부상병 치료는 현대적인 무기만큼 중요합니다.

유엔군 특히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발전한 군 의료체계를 6·25전쟁에도 적용했습니다. 전쟁 중 매년 10만 명 가까운 장병이 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미군의 경우 부상당한 병사는 의무병에 의해 전투지역을 벗어나 차량이나 H-13 헬리콥터 등에 의해 후송됐습니다. 후송된 병사는 군 의무대 특히 매시(MASH·군 이동 외과 병원)에서 중요한 치료를 받았습니다.

매시는 1개 사단당 1개 설치가 원칙입니다. 지휘부와 수술 전 및 쇼크 관리부, 수술부, 수술 후 회복부, 약국, 병실부로 구성됐으며, 군의관 14명, 간호장교 12명, 사병 95명 등이 근무했습니다. 매시는 6·25전쟁 중 ‘최고의 시설을 갖춘 이동식 천막 병원’이었습니다. 그러나 환자가 갑자기 많이 후송되면 2시간 걸리는 수술을 20분 이내에 마쳐야 했습니다. 정상적인 치료보다 빠른 수술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미군 외에도 인도, 이탈리아, 스칸디나비아 3국 등도 의료진을 보내 부상병을 치료했습니다. 특히 스칸디나비아 3국은 사전에 협의라도 한 듯 역할을 분담해 의료를 담당했습니다. 스웨덴은 야전병원, 노르웨이는 매시, 덴마크는 병원선을 파견해 유엔군과 국군, 민간인 등을 치료했고, 심지어 포로도 치료했습니다. 스웨덴은 부산에서 200병상을 운영하며 약 2만5000명을, 노르웨이는 매시에서 약 9만 명을 치료했습니다. 덴마크의 병원선 유트란디아는 시설이 좋아 병사들에게 ‘꿈의 병원’으로 인식됐습니다.

6·25전쟁 중 유엔군의 의료체계는 국군에도 점차 적용됐습니다. 전쟁 초기 의료진이 부족하고 병원시설이 열악했으나, 점차 의약품과 의료기술이 보급돼 국군의 의료체계도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휴전선에서 주로 전투가 이루어진 2년 동안에는 미군 의료진이 국군 의료진의 교육을 담당했으며, 민간인들도 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미군의 최신식 의료기술이 국군 의무진에게 전수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6·25전쟁 중 미군은 5명당 1명, 국군은 3.14명당 1명이 부상을 당했으나, 병원 내 사망률이 비슷할 정도로 국군의 의료 체계가 발전했습니다.

전쟁 중 특히 발전한 의료 분야는 수혈과 마취, 방사선 촬영, 성형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등입니다. 초기 미군 의료진은 경험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으나, 수많은 수술을 통해 경험을 축적했습니다. 미군 의료진의 경험과 의료기술은 국군 및 민간인 의료진에게 전수됐습니다. 휴전 무렵 미군 의무 자문관들은 “남한의 신경외과 수술 실력은 아시아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

이 글은 김태우의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와 전우용의 책 ‘현대인의 탄생’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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